[Opinion]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 [영화]

글 입력 2017.12.1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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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개봉했던 한국 영화의 리스트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한 해 개봉되는 국내 영화의 수도 증가하고 있고, 나날이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화들도 많지만, 2017년 개봉한 국내 영화들을 돌아보면 임팩트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2013년 개봉한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를 기점으로 국내 영화계에서는 남성 느와르를 다룬 작품들이 흥행 가도를 달려왔고, 특히 2017년은 '더 킹', '불한당', 등 남성 중심의 느와르 영화들이 스크린을 점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작품이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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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반대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여성 배우가 등장하는 작품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영화계의 현실이다. '아이캔스피크', '여배우는 오늘도' 등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작품들도 개봉하긴 했으나 그 수와 미디어 노출도는 남성 영화에 비교할 바 못 된다. 또한, 남성 중심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경우 그저 특정 관객들의 '눈요기'를 위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징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영화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영화 개봉작들의 포스터를 보면 숨이 턱턱 막혀온다. 포스터를 가득 메운 남자, 남자, 남자 배우들. 또 같은 맥락의 스토리에 몇 가지 요소와 주연 배우만 바뀐 한국 영화들을 보며 두통을 느끼던 중 아주 놀라운 작품을 발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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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95년 개봉한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총 10명의 여성 캐릭터들에 의해 사건이 발생하고, 진행될 뿐만 아니라 사건을 세상에 전달하는 캐릭터 역시 여성이다. 물론 90년대 초반의 작품인 만큼 연출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보이지만,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에 군더더기가 없고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가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다. 이 영화의 주요 사건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던 여성을 본 주변 여성들의 분노에 의해 발생하고, 이들의 투쟁 과정에서 여성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온 시련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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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녀 기순은 자신이 혼자 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온 시선과 편견, 그리고 열등한 대우로 인한 고충을 이야기하고, 남편과 짜장면 가게를 운영하는 포항댁은 남편보다 자신이 일을 더 많이 하지만, 남편이 가장 노릇을 하는 것, 자신은 가사 노동까지 부담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을 더 적게 받는 것의 부당함에 관해 이야기한다. 호스티스 윤희는 남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술집 여자'지만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같은 호스티스 명화는 회사들이 내세우는 외모 조건으로 인해 취업에 실패하고 호스티스가 된 비화를 이야기하며 취업 시장의 부당함을 보여준다.

또, 부녀회장 은주 엄마는 세상의 절반은 여자들이 만들었으니 국회의원 절반도 여성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웃기도 한다.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 남편에게 구타당하고 있던 정희와 그녀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경숙은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려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밤무대 가수 유미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남성의 몸으로 태어난 여성(MTF:male to female)으로 처음 그녀의 정체에 당황한 옥상의 여성들은 그녀를 배척하려 하지만, 곧 자신들이 아니면 그녀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없고 그녀 역시 여성이라며 더 단단한 유대를 다진다. 또한, 이들의 투쟁을 중계를 통해 시청한 또다른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연대를 형성해 남성 중심의 사회를 거부하고, 옥상 위 여성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등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 시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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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도 전에 나온 이야기와 지금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하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역시 놀라운 부분 중 하나이지만, 가장 씁쓸한 것은 현재 한국 영화계에는 이처럼 여성만의 특수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남성 감독들은 자신이 여자를 잘 몰라 여성 캐릭터를 어렵다며 웃지만, 사실 그들의 이런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영화처럼 여성만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없다면,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보여주면 된다. 만약 그것조차 어렵다면 남성 캐릭터만 등장하는 작품을 쓴 후 그중 캐릭터 몇몇을 여성으로 바꾼다면 그것만으로도 완벽하다. 그런데 이처럼 '여자를 잘 몰라서'라는 말은 그저 이들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미 많은 관객이 남성만이 존재하는 한국 영화에 지쳐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앞으로 다가올 2018, 2019년에는 보다 의미 있는 여성 캐릭터, 여성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욱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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