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꿈의 궤적 #소라게 #나의 강박 #그림자 #날 좋은 날

2017.11.10 11.
글 입력 2017.11.1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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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꿈의 궤적


현재 하고 있는 의상학 전공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차근차근 돌이켜 떠오르면 여러 순간들을 만나게 되요.

엄마가 채널을 돌리다 스쳐 지나간 패션쇼의 영상.
다른 것이 나오면 울어버림으로써 갖게 된 채널 독점권.
비슷한 박자로 반복되는 건조한 음악에
화려한 옷을 입고 무표정으로 걸어가는 모델들을
넋을 놓고 보던 순간.

미술 시간 중 가장 좋아하던 자유그림 시간.
무엇을 그릴지 망설이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는 나에게 물어오는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해맑게 웃으며 화가라고 대답하는 순간.

짝꿍과 함께 꿈꾸는 미래 직업을 나누는 시간에
파일럿이라는 아이의 꿈과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나의 꿈을 나누며
꼭 되자며 약지를 걸던 순간.

새로운 꿈을 찾았지만 될 수 있는 방법을 몰라,
매일 보던 패션 잡지의 에디터분에게 열심히 써서 보낸
메일과 그 답메일의 마지막 문장
언젠가 패션 필드에서 만나요.를  읽으며
패션 에디터가 되겠다 다시금 다짐하던 순간.

학교 생활기록부에 적어낸 꿈이 정확히
무엇이냐며 교무실로 불러낸 선생님께 신이 나서
패션 크리에이티브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 드리던 순간.

꿈을 여러 번 달라졌지만
그 궤적은 뚜렷이 한 선을 그리며
이어져 왔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꿈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단지 좀 더 현실에 맞춰져 가고 있음을 느끼며
오늘도 꿈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순간이 있어요.





#46 소라게


보송보송 털이 있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저의
첫 애완동물, 아니 요즘 말로는 반려동물은
의외로 소라게였답니다.

어떠한 계기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많은 소라게가 있던 아크릴 상자 속에서
두 마리를 데려오게 되었어요.

‘게’라니 참 소통이 되려나 싶기도 하겠지만
집에서 꺼내서 손 위에 올려 놓으면 소라 속에서 잠시 망설이다
주인의 온기를 느끼고는 금세 얼굴을 내밀곤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곤 했어요.

두 마리 모두 손위에 올려도
손바닥을 다 채우지도 못할 작은 생명체였지만
큰 친구가 되어주었어요.

밤이 무서워 잠 못 드는 날에도,
활동을 막 하기 시작한 소라게들이
두 집게발로 자갈을 열심히 파 내려가는 소리로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었어요.

어른들이 일을 나가 텅 빈 낮 동안의 집에서
하루의 일을 묵묵히 들어주는
훌륭한 친구이기도 했구요.

보통의 소라게들보다 오래 오래 살았던 저의 작은 두 친구는
어느 날 소라 속에서 멈춘 채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어디가 아팠던 건지,
그저 떠나야 했던 순간이었던 건지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이별한 것이 너무나 슬퍼
아직도 그 모습이 생각이 나요.

동물 친구란 참 좋지만, 마지막을 보아야 한다는 게 두려워서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치는 길냥이에게도
혹시나 이별을 할거라면 미리 말해달라고 작게 이야기했답니다.
꼭 들어주었으면 해요.





#47 나의 강박

그것이 강박이었는지 혹은 결핍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답니다.

두 번째 초등학교를 다닐 즈음에
집안일을 조금씩 거드는 것으로 적은 용돈을 벌 즈음에
이상한 습관이 생겼어요.

학교를 갈 때에
조금씩 돈을 들고나가,
아침마다 문방구를 들러 펜이나 수첩을 사왔어요.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심지어는 등교할 때뿐만이 아니라 하교할 때에도요.

샀던 펜을 또 사고, 샀던 수첩을 또 사곤 했어요.
사서 쓰지도 않는 펜과 수첩은 왜 그렇게 많이 사는지.
스스로도 잘못된 것을 아는데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는 행동과 같은 물건을 모아두어야 안심이 되는
그 생각이 멈추질 않았어요.

일년 정도를 반복하다 보니
마음이 피폐해져 가는 것 같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그 물건들을 모두 정리했어요.
쓰지도 못한 물건들을 모두 버려버렸어요.
버림으로써 떨쳐버렸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요.
무의식적으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계속 사야 안심이 되는,
이미 있는 물건이어도 쓸 수 있는 여분이 아주 많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그런 강박과 알 수 없는 결핍이 사라졌어요.

마음과 생각이 자란 걸까요?
필요한 물건만 있으면, 당장 쓸 하나만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소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 걸까요?





#48 그림자


겁만은 어린 시절의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 중의 하나는 그림자였어요.

잠을 자기 위해 누웠을 때에 창 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 그림자, 건물의 그림자가
너무 무서웠어요.

무서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 그림자는 본래의 형태를 잃고
귀신으로, 동물로, 형태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것으로 변해버려요.

까만 형체는 창문 밖에서
방안으로 발을 넓혀와
아이를 잠들지 못하게 자꾸 건드렸어요.

그림자를 보지 않기 위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자는 습관과 옆으로 누워 자는 습관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사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깜깜한 방안에서 혼자 작업을 하는데도
무서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떠올랐어요.

새벽녘에 가위를 눌리고는
자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수 많은 날들과
불 꺼진 기숙사 방안으로 드리우는
불 켜진 학교 운동장 사물들의 그림자를 피하려고
자장가를 녹음한 1분도 채 안 되는 파일을 몇 백 번을 듣던 밤들이 떠올랐어요.

귀신은 없다고 믿는 무덤덤한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바깥 풍경은 물론, 햇빛까지 차단해버리는 암막 커텐의 덕일까 싶기도 해요.





#49 날 좋은 날


창문이 컸던 안방에
정오의 햇살이 눈부시게 환하게 들어오던 어느 주말이었어요.

그 방에 있던 넓은 침대 옆에
엄마가 저의 침대를 옮겨놓았던 날이었어요.

두 침대가 붙으니
마치 방 전체가 침대가 된 것처럼
넓고 푹신한 바다가 되었어요.

작은 아이가 한 침대 끝에서 다른 침대 끝까지
콩콩 뛰어 그 넓음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마구 뛰다가 뒤로 고꾸라져 폭신한 이불 위로 툭 떨어지기도,
폴짝 뛰어 천장을 한껏 만져보기도,
휘릭 공중에서 앞 구르기를 해버리기도 하였답니다.

정오의 눈부신 햇살이
잔뜩 뛰어 일어난 침대들의 먼지에 의해 잘게 부수어져서
방안을 더더욱 노란 빛으로, 환한 빛으로 채웠었어요.

참으로 눈부시고 따뜻하고 즐거운 순간이었어요.
고작 두 침대가 붙었던 그 순간은요.







전문필진 명함.jpg
 

[정연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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