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선호는 왜 벌레가 되었을까?

연극 '소모' 리뷰
글 입력 2017.09.10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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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소모>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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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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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소모> 에는 소모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선호, 선호 아버지, 선호 어머니, 선호의 여동생, 선호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들... 소모되는 사람이 있으면 분명 소모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 둘 사이에는 교집합이 있다. 선호 아버지가 바로 그 교집합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는 소모되는 대상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적극적으로 소모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소모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소모시키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자신의 딸을 벌레가 되어버린 선호를 대신할 '대체품'이라 부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관객들을 향해 '요즘 젊은이들은-'하고 시작되는 설교를 당당하게 늘어 놓는다. 선호 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런 환경에서 선호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소모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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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 를 국어사전에 검색해 보면 '써서 없앰' 이라는 뜻풀이가 나온다. 즉 소모의 끝은 소멸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호가 벌레로 '변신'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변신이라는 단어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변신하다' 라는 말은 수동태로는 좀처럼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변신은 스스로 행하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당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선호가 벌레가 된 것은 더 이상 소모되지 않겠다는 저항이면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벌레라도 되겠다는 몸부림이다. 선호는 소멸되지 않기 위해 변신해야 했다. 그러나 서로를 소모시키는 데 익숙한 세상에서 그 낯선 변신은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너는 왜 소모되기를 거부해?
원래 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건데.

왜 노력하지 않아?
왜 세상에 편입되려 하지 않는거야?


벌레가 된 선호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를 몰아붙이는 세상 속에서 선호는 기댈 곳도, 숨쉴 틈도 없다. 세상과 연결되는 물건들을 하나씩 끊어내며 고립된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마이크에 대고 자신의 노래를 있는 힘껏 부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면 그는 무대에 흩어져 있는 각종 잡동사니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되어야 할 하나의 소품으로서 카트에 실린다. 연극이 시작할 때만 해도 배우였던 사람이 연극이 끝날 때 쯤에는 소품이 된다는 점이 굉장히 상징적이다.



독특한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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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는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독특한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조명이 환히 켜져 있을 때 무대 세팅을 하고 배우들이 쉴 때도 완전히 퇴장하지 않고 무대 한구석에서 대기한다.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대놓고 끝났다고 설명을 하는가 하면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 말고 뜬금없이 관객석으로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한다. 제 4의 벽을 부수고 관객에게 여기는 무대이며 지금은 공연 중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는 것이다. 또한 미친듯이 달리는 것으로는 부족해 온몸에 먹물을 묻히고 종이 위를 구르고서야 겨우 서류 전형을 통과하는 선호의 모습, 다른 무대소품들과 함께 정리되어 카트에 담겨나가 마치 운구차가 지나가듯 무대를 천천히 지나가는 장면 등 최소한의 소품만을 이용한 상징적인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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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선호의 여동생이 바닥에 죽은 듯 널브러져 있는 선호를 바라보며


"나는 절대 벌레가 되지 않을거야."


라고 말하며 끝난다. 과연 그녀는 그 다짐처럼 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이다. 우리가 소모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벌레가 될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연극이 문제를 제기했으니 충분히 고민하고 해결할 방법을 알아내는 건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오늘도 사람이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연극을 본 후에 무거운 고민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공연 정보>

공연기간: 2017년 9월1일(금)~9월 3일(일)
금-오후 8시/토-오수 3시, 6시/일- 오후 3시
공연시간: 90분
공연장소: 소월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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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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