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라비아의 길, 그 오래된 길을 어린 어른이 되어 걷다. [문화 공간]

나는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한다.
글 입력 2017.07.1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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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진로를 상담해주시던 교수님이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호 할아버지가 다 되신 노교수님이셨다.

'네가 미래의 불확실함에 고독을 느끼듯, 나는 죽음에 고독을 느낀단다.
이건 병이다. 각 나이에 맞게 걸리는 병.
사람들은 기묘해서 병이라는 것을 싫어해. 그래서 미친 듯이 치료하려고 하지.
그런데, 그 과정에서 치료가 이루어진단다.
즉,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야.
네가 네 미래를 아직 모르듯, 나도 내 죽음을 아직 모르겠구나.'

교수님은 분명 죽음을 두려워하고 계셨다.

그때 교수님의 손자로부터 전화가 왔고, 교수님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삶이란 것에 직격탄을 맞았다.

일그러졌으나 찬란하게 아름다운 삶의 얼굴이란 무엇인가.
불안해하며 나는 '아라비아의 길' 전시회에 갔다.


아라비아의 길.jpg
 

맨 처음 전시회장에 들어섰을 때 볼 수 있는 첫 번째 주제는 
아라비아의 선사시대(Prehistory of Arabia)이다.

'첫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나타났다. 몇몇 사람은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학자들은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가 아라비아를 거쳐 전 세계로 확장해갔다고 주장한다.
아라비아의 선사시대 석기들은 그 증거가 된다.'

이렇게 건조하게 설명되었지만, 석기들은 사실 상당히 매혹적인 유품이다.
그 시대의 스마트폰급으로 달고 살았을 그 석기가 살아 있는 사람의 손에 붙잡혀
염소를 잡는 데 쓰였다고 상상해 보자.
아버지는 염소를 잡고 어머니는 요리를 해서 자식들은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부모는 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봤을 것이다. '아이고 잘 먹네 우리 새끼'하고 행복해했을 것이다.
이 행복은 현대 우리나라에서도 식사 시간에 자식들을 보는 부모의 반짝이는 눈에서도 얼핏 엿보인다.
석기의 손태는 그 감정을 절절히 전해준다.
그 감정이 비록 순간적이나 분명히 영원함을 넌지시 알려주면서.

이렇게 옛날 것들을 보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때 그 행복한 웃음소리가 영원하기를 꿈꾼 적도 있었다. 지금 나의 문제점,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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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사람 조각들 - 인간을 묘사하는 인문학적 성찰은 이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로가 서로에게 본래부터 상처를 주고받으며,
본질적으로 다들 얼굴에 자신만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크면서 깨달았다.
왜냐하면, 인간과 나에 대해 극심하게 절망하고 있을 때,
그 절망을 모두가 나누어 가졌음을 누군가 넌지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비껴 앉은 아버지의 야윈 잔등을 보면서 민홍은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는 고생대의 한 화석을 떠올렸다.
그 화석에 대한 일차적 기억은 앙상함이었고 그리고 가슴 답답한 세월의 무게였다.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김소진, 쥐잡기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채 일상은 흘러가고, 역사의 수레바퀴, 즉 문명이 되어 영원한 마음만 남긴다.


황금 가면.jpg
황금가면과 황금장갑


딸이 죽었다. 부모는 상인이었다. 부모가 아는 가장 좋은 것은 금이었다.
그래서 딸의 마지막을 가장 좋은 것으로 입혀 보내려 황금 가면과 장갑을 만들었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부모 없이 그 먼 길 가는 데 마음 찢어지게 걱정되니까. 황금은 그렇게 격상된다.

인간은 고민한다. 삶에 대응하여 미친 듯 날뛰며 살았다면,
죽음에 대응하여 내가 믿고 복종하여 따를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에게 복종의 행복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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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황금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삶의 두려움은 막아 주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막아 주지 못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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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란과 사원의 문


죽음의 두려움을 막아 주는 것은 신인가. 저 문을 향해 가면 마치 황금을 주고 삶의 승리자가 되듯, 
죽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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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대도 영원할 수 없으며 그들이 영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금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현세적 측면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영원하지 못하다.


신은 영원하다.jpg



신은 영원하다.



즉, 죽음에는 승리자가 없다.
죽음이라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 구원받은 죽은 자만이 있을 뿐이다.
현실에 남은 자들은 짧게 느낄 수만 있을 것이다.
글로써 선대들은 후손을 도우려 한다. 
자신들이 남기고 떠날 고독을 읽혀 당신은 조금이라도 덜 고독하라고.
비석에 쓰인 글들은 내가 전혀 모르는 글자로 쓰였지만, 그 마음은 석기의 태처럼 전해졌다.


죽음은.jpg

 

죽음은 세상에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주었소.


죽음이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듯이.

그래서 나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한다.
바깥세상을 걱정하는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지어진 이 이야기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전 콧잔등 뽀뽀처럼, 사랑이 듬뿍 담겼다,
짧지만 영원하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품고 이 먼 타국의 옛날 것들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성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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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Danny
    • 안녕하세요. 두레에 참가중인 정연수입니다. 처음에 노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각 나이에 맞게 걸리는 병. 하지만 치료하려고 애쓰는 그 과정에서 치료되는 병. 아마 그 치료라는 것이 인생일까요? 병의 끝에는 죽음이 있으며 그 죽음은 병을 끝낼 수 있기에 아름답고 완벽하다고 말되어 진걸까요? 채윤님의 글을 보면서 영원과 영원하지 않음에 대해서 고민해보며 2번 읽어보았네요ㅎㅎ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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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인
    • 안녕하세요. 두레에 참가 중인 최지은입니다. 글 재밋게 잘 봤어요. 처음에는 글 양식이 문단이 아니라 계속 줄바꿈이 이어져서 의아했는데, 보다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짧은 문장 하나 하나에 깊은 사색이 잠겨있어서 좋았습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항하여 어떻게 살것인가를 보면 잘 나오는 것 같습니다. '복종의 행복'이라는 표현이 와닿았습니다. 죽음은 영원하고 우리는 벗어날 수 없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 성찰하게 되네요. 황금으로 덮어도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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