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베르 카뮈 [오해] 돌아보기 -4 [문학]

[오해] 3막 : 종말
글 입력 2017.06.2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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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Le Malentendu)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등장인물 : 마르타, 어머니, 얀, 마리아, 늙은 하인

3막 : 결말

3막 1장

거사가 끝난 후, 새벽녘의 응접실. 마르타는 떠날 생각에 들떠 있고, 지친 어머니는 끝난 것에 그저 안도하고 있다. 이 때, 늙은 하인이 마르타에게 얀의 여권을 건네고, 모녀는 자신들이 어젯밤 죽인 남자가 그들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아들보다도 오래 살아 못볼 꼴을 다 보았으니, 이제 진정 쉬고 싶다고 한다. 어미가 되어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면, 이 땅에서의 쓸모가 다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마르타는 거칠게 항변한다. 오빠는 누릴 것을 다 누려보았으나 자신은 이제껏 이 시골에서 고생만 했다며, 나를 사랑한다면 오빠의 죽음보다는 나의 삶을 봐달라고 애원한다. 그녀는 악에 받쳐, 얀이 오빠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문밖을 나서고 만다.

3막 2장

마르타의 독백.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원하는 것을 다 가졌던 오빠와, 평생 떠나고 싶었던 고장에 갇혀,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비교, 한탄과 세상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다. 마르타에게 있어 오빠는 그녀가 갈망했던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채,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사랑마져 가져간 사람이다. 마르타는 어머니와 자신을 이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범죄'의 한복판에 혼자 버려졌다.

3막 3장

마리아가 얀을 찾아 여관으로 찾아온다. 마르타가 무관심으로 응대하자, 자신이 얀의 아내이며, 얀은 당신의 오라비이니 우리는 자매지간이라고 밝힌다. 그런 그녀에게 마르타는 얀의 부고를 알린다. '사랑'을 믿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마리아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이 결핍된 채 살아온 마르타의 가치관이 부딪친다. 마리아는 행복하게 살던 남편이 이 고장에 발을 들인 것은, 집을 되찾고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함이었음을 말한다. 그녀는 마르타가 가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부숴버린 것들을 일깨워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타에게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녀는 얀과 자신이 똑같은 고독을 느꼈음을 깨닫는다. '집'의 부재. 마르타는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공동의 '집'인 죽음을 선택하나, 그곳에서마저 혼자이기를 선택한다. 오빠와 어머니기 잠든 물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방에서 혼자 떠나기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부조리보다 사랑과 선함을 믿는 마리아의 순수함을 짓밟는 말을 한다. 당신이 그렇게 찾아헤매는 하나님에게 기도해, 돌 같은 사람이 되어라, 어떤 외침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차가운 평온함을 갖게 해달라 빌어라, 그것만이 유일한 행복이다. 마리아는 절망한 채 응접실에 혼자 남겨진다.

3막 4장

하나님을 부르짖는 마리아 앞에 늙은 하인이 나타난다.

"부르셨습니까?"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도와준다고 말해 줘요!"
"아뇨."


이 극은 무대에 올라 단 두 마디만을 하는 늙은 하인의 마지막 대사로 막을 내립니다.

처음 대본을 읽을 땐 '부조리극'에 대한 편견과 딱딱한 번역투의 대사가 어우러져서 이 극이 매우 어려운 연극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 안에 숨기거나 꼬아 감춘 것 없이 솔직하고 직설적인 대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극의 내용을 간추려보았으니, 이제 제가 느꼈던 점과 저만의 해석들을 1막을 해석하며 골라냈던 여섯가지 키워드에 대입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 오해, 그리고 진실

그러나 이 비극이 끝났을 때, 이 연극이 숙명에 대한 굴복을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반항의 극인 이 작품은 정직함의 윤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에 사람이 타인에게 올바르게 인식되기를 바란다면 단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침묵을 지키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면 사람은 고독하게 죽게 되고 그의 주위의 모든 것은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 반대로, 사실을 말한다면 그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타인과 자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나서 죽게 되는 것이다.

카뮈의 서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오해'이지만, 저는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진짜 주제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물들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비극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간에 진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카뮈는 숙명이 이끈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숙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휘둘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진실'한 것 뿐이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요?



2. 돌아온 탕아

이 작품은 고대 비극 작품들의 공통주제인 '숙명'을 밑바탕으로 삼고 그 위에 이야기를 세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숙명'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정말 이야기의 아래에 잔잔히 흐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야기의 표면에 드러나는 요소중에는 오히려 그리스신화보다 몇 가지 성경의 요소가 더 돋보인 것 같습니다. 그 중 직설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돌아온 탕아'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신약성서의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아버지의 곁을 오래 지키고 있었고, 막내는 미리 상속받은 유산을 가지고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거지꼴이 된 이후에야 정신을 차린 막내는 초라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를 측은히 여긴 아버지는 막내에게 가장 좋은 옷과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며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맏이가 아버지에게 항의하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으니,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원 내용은 죄지은 자라도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을 담은 이야기입니다만, '오해'는 여기에서 전반적인 틀만 차용해온 대신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누이는 마음이 가난해 내어줄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돌아온 아들은 성공한 사업가였고, 결론적으로는 누구하나 구원받지 못한 채 끝이 나버립니다.

저는 이 [돌아온 탕자]도 결국은 '진실'을 강조하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돌아온 탕자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아버지에게 진실을 고했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모녀는 범죄자임을 숨겼고, 당신을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사냥감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아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이 중 진실한 사람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3. 이방인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두 번째 장에서 뫼르소는, 감옥 안에서 발견한 신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노랗게 색이 바랜 오래된 신문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사실 같지 않은 한 편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건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가, 많은 돈과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남성이, 자신을 밝히지 않고 어머니와 누이가 운영하는 여관에 투숙합니다. 가족들을 놀래켜 주려는 의도였으나, 그날 밤 그는 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죠. 다음날 여관을 방문한 아내에 의해 사실이 밝혀지고, 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어딘지 '오해'와 많이 닮은 내용입니다.

한 편, 얀은 마리아와의 대화 중에 자꾸만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언급합니다. 고향을 떠나, 가족들에게 잊혀진 채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없기에, 어디에 있으나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느끼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카뮈가 두 작품을 연계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작가의 작품으로서 공유하는 어떤 주제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 단어 étranger는 형용사로 '외국의, 외부의, 낯선, 모르는, 타인의, ~에 관계 없는'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사로는 '외국인, 이방인, 타인'을 뜻합니다. 사람이 한 집단에서 스스로를 '이방인', 즉 낯선 사람이자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 타인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들을 이행하지 않고, 본인이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말했다고 주장하죠.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얀은 '태양의 나라'에서 재산과 사랑하는 아내를 얻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는 그가 두고 온 가족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자신의 생사조차 불문명한 상태이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인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잊혀진 그는,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상태에서도 스스로를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느낍니다.

뫼르소와 얀은 전혀 다른 캐릭터이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으나,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나누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인 부모를 둔 프랑스 국적의 사람이면서도 알제리를 고향으로 가진, 본토에는 식민지 출신으로, 식민지에는 본토 출신으로 보이는 알베르 카뮈 자신 또한 이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자신의 캐릭터들과 함께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숙명(또는 신)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상징적으로 사용했던 '죽음'이라는 장치를 의인화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La Mort(죽음의 여신)' 캐릭터는 대사는 한 마디도 없지만 극의 중요한 부분에 등장하며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로미오에게 보내는 줄리엣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장면을 삽입하여, '비극적인 숙명'을 보여줍니다.

'오해'에서 이런 '죽음의 신'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늙은 하인'입니다. 그는 마르타가 얀의 여권을 확인하려는 순간 등장하여 방해하고, 얀과 마리아의 대화 도중 등장해 그들이 더 이상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도록 막고, 마지막 기회에 얀의 여권을 주움으로써 모녀가 아들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며, 최후의 순간 사실을 밝힘으로써 비극을 극대화시킵니다.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난 후에 그 과정을 되돌아보며, "아,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하는 생각들을 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늙은 하인은 그 순간들을 원천봉쇄하며, 이 일련의 일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일이라고 도장을 쾅 찍어버리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비극'의 플롯을 지배하는 '숙명'의 역할이죠.

또한 3막 4장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작품에서 그리는 '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충고 하나 하죠. 당신이 비는 하나님께 말해 돌 같이 차가운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하세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 지니고 있는 행복, 단 하나의 행복입니다. 그 어떤 부르짖음에도 결코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돌같이 차가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마르타의 대사에 나타난 이 것이, 이 작품에서 그리는 신의 모습입니다. 마르타와 어머니는 가난에 고통받다 못해,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신은, 이들에게도 이들이 저지른 살인의 피해자들에게도 자비를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마르타에게 신은, 구원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지 않은 채, 그저 존재하며 세상이 돌아가게만 내버려두는 차가운 돌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3막 4장에서 늙은 하인이 신의 역할을 대체합니다.

"부르셨습니까?"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도와준다고 말해 줘요!"
"아뇨."



5. 알베르 카뮈

작품은 작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작가의 의견을 대변합니다. 그러니 카뮈의 모든 작품이 그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마지막 키워드로 알베르 카뮈를 고른 것은, 각 인물들이 모두 카뮈의 여러가지 다른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얀'은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고뇌를 담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 비극의 핵심인물로서, 카뮈가 '숙명에 휘둘리지 않길 원한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몸소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서문에서 언급한, 진실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을 초래한 인물이 바로 얀이죠.

침묵을 지키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면 사람은 고독하게 죽게 되고 그의 주위의 모든 것은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 반대로, 사실을 말한다면 그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타인과 자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나서 죽게 되는 것이다.

'늙은 하인'은 카뮈가 이 작품에 녹이고자 했던 '숙명'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마르타'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인식을 담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세상이 사람들에게 하는 일보다는 덜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선사하는 죽음이, 삶이 주는 온갖 고통보다는 견딜만하다는 주장입니다. 부조리한 사회에 내동댕이쳐져, 사회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똑같은 부조리를 양산하고 있는 모습, 그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비극적인 인물들입니다.

'마리아'는 결과적으로 카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직설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서로에게 진실된 모습일 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마리아의 주장이야말로, 카뮈가 비극적인 면모를 통해 비극을 걷어차고 난 자리에 세우고 싶었던 진실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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