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떤 로맨스로도 정의되지 않는,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공연예술]

글 입력 2017.06.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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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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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을 보기 전에는 사실 별 생각 없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의 일부라고 들었고, 왠지 재미 있을 것 같아서 덜컥 보러 가기로 했고, 영화나 연극을 볼 때 사전에 최소한의 정보만 알고 가고 싶을 때가 많아서 이번에도 무슨 내용인지 그 줄거리조차 보고 잊어버렸다. 사실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만한 내용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남매 간의 사랑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으니까. 같이 보러 간 언니가 25년만에 재회한 남매가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가 기대 된다고 말했을 때, 그때서야 상기되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냥 아 맞다, 그런 내용이었지. 싶었다. 그리고 연극이 진행되면서 나는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반응했던 게 무안할 정도로 그 분위기에 몰입했다.

 나에게 충격을 줬던 그 모든 것들을 그저 위험한 분위기라는 말로 일축하는 것도 작품에 대한 실례인 것 같다. 나는 이 연극이 사람들이 수면 위로 꺼내 놓기 불편해하는 것들, 무의식 아래의 깊숙한 감정들을 끄집어내서 관객의 면전에 집어 던지고 있다고 느꼈다. 우선 중심이 되는 소재부터 가족 간의 성애라는 점에서 그렇다.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의 행동에서는 분노와 증오, 속물적인 금전적 욕망, 사랑에 대한 비참한 갈망, 성적인 욕구, 밑바닥의 삶 등 아름다운 것만 보고 싶은 우리의 의식이 애써 외면하는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인물들은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 행동하며 그 감정들이 연극에 더 잘 녹아들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든다. 이 날 것의 감정에 노출되면서 불편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도 역시 그랬다. 하지만 불편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억눌러 왔던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정들이 자극 받는 것을 느꼈다.

 이 작품은 분명히 흔히 봐 왔던 로맨스는 아니다. 나는 <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에서 말하는 로맨스의 개념이, 앤서니 기든스의 낭만적 사랑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로맨스는 ‘소설’의 어원이기도 하다. 소설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낭만적 사랑은 당시의 규범 안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사랑의 환상이다. 낭만적 사랑은 영원하고 유일한 대상과의 사랑을 통해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로맨스 이야기들은 이러한 종류의 낭만적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와 한솜의 이야기에 낭만은 없다. 갖가지 욕망과 외로움,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니라 인물들 자체이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들이 만나 만들어낸 세계이다. 이들에게 서로가 유일한 이유는 애초에 그 세계에 둘밖에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들의 사랑은 성애가 성립되면 가족애가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위태로운 사랑이다. 그렇기에 섹스를 하기 직전, 미소는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자신의 얼굴에서 동생을 지운다.

 이들이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이라는 사실에서, 근친상간이라는 영역이 관습적, 규범적으로 금기시되어 왔던 노인과 청년 간의 성애, 동성 간의 성애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생각해 보았다. 여러 사회에서 가족 간의 성애가 금지되는 이유는 유전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이미 날 때부터 디폴트로 가지고 있는 “가족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족의 사랑은 다른 관계들에는 없는, ‘원래부터 주어지는 특별한 사랑’이며, 여기에 성애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통용되는 상식이다. 세상 사람 대부분이 가족에 대해 성애를 느끼지 않는 것은 어떤 거창한 이유에서라기보다 그냥,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랑을 특별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양립하기 힘들다. 이것은 규범적으로 거부되는 나이 차라는 특수한 조건보다 훨씬 유구하고 보편적이고, 도전하기 힘든 영역이다.

 미소와 한솜은 한 부모 밑에서 그 가족 간의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25년간 떨어져 있었다는 상황이 그 사랑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미소는 끈처럼 가느다란 그 감정을 붙들고 한솜을 찾아 한국으로 온다. 한솜도 누나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지니고 살았지만, 그를 드러내며 반기기는커녕 이제 와 자신을 찾은 가족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표출한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둘은 너무 달라 보인다. 미소는 부자인 것처럼 묘사되고 한솜은 단칸방에 혼자 살며 술에 기대 하루 하루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들이 너무나 닮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재외동포라는 정체성이 끼친 영향이 거울과 같이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그들에게 작용하는 지점이다. 한솜은 나고 자란 땅인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누나가 나타날 때를 위해 미국인 친구를 사귀고 영어를 배우고 그들과 어울리며 밤일을 하기도 한다. 미소 또한 매춘을 하며 미국에도 한국에도 동화되지 못한다. 남매가 모두 가지고 있는 매춘이라는 행동 양식이 오히려 성애의 영역을 보다 자유롭게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조금씩 금기에 다가설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 상류층인 잭은 미소가 너무 굴곡진 인생을 산, 자신과 확연히 다른 부류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한국에 미소가 마음 놓고 있을 곳도 없다. 딱 하나, 한솜의 곁을 제외하면.

 25년간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소와 한솜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안식처는 서로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들이 가까워진 이유에 남녀 간의 사랑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유일한 안식처이자 자기 자신의 거울인 동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미소, 이것은 한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둘이 닮은 궁극적인 이유, 둘의 관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가족이라는 정체성이기에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성애를 위해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버리면, 그들이 서로에게 안식처였던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미소는 자신을 파괴하면서라도 가족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미소의 동생이라는 정체성도,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잃고 혼자 남은 한솜은 얼마나 외로울까,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했다.

 이런 ‘로맨스’가 또 있을까? 스스로 로맨스가 아니라고 명시하는 <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 안의 사랑은 그냥 이야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가 되기도 하고, 그들을 살게 하면서도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요소이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이렇게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연극은 나에게 충격적이었고, 보고 나서는 마음이 아팠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인간의 정체성을 뿌리까지 뒤흔드는 것이고, 규범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은 누가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우리는 현실의 제약 때문에 사랑할 기회를 너무 많이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모로 생각이 복잡해지는, 제목에 충실한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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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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