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웅 파랑과 감염된 사람 -윤이형 ‘큰 늑대 파랑’- [문학]

사라, 재혁, 정희, 아영. 그리고 파랑. 그들의 모습 사이에서 나는 우리를 보았다.
글 입력 2017.05.10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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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은 감상문 형식으로 쓰였으므로 매우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편소설 ‘큰늑대 파랑’을 읽으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기고합니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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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 파랑과 감염된 사람
-윤이형 ‘큰 늑대 파랑’-


  사라, 재혁, 정희, 아영. 그리고 파랑. 그들의 모습 사이에서 나는 우리를 보았다.

  늑대의 이름은 파랑이다. 파랑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파랑을 지킨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를 잃고 세상에 휩쓸려 더러워지면, 파랑이 달려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파랑은 네 명의 대학생이 만들어낸 한낱 가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아마 좀비도 저 때까지만 해도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비는 세상에 판을 치게 되었고, 파랑은 그들로부터 부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쓴다. 그러나 부모 네 명 중 세 명은 이미 좀비에게 당했고, 아영만이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라는 ‘외모지상주의’에 치이는 고립된 여자였다. 글 쓰는 것을 사랑했으나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뚜렷한 직업의식을 잃은 것이다. 좀비가 나타난 것-사회에 이상이 생긴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사라는 이미 사회 내에 단물은 다 빠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좀비에게 가장 먼저 습격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재혁은 일종의 마조히스트였다. 본인을 온갖 모습으로 바꾸었다. 이따금 ‘예의’를 도구로 밀기도 했다. 재혁 역시 본인이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은 딱히 없었다. 마지막, 재혁이 좀비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습격당하는 모습은, 재혁의 이러한 모습의 끝이었다. 정희는 재능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특히 사라와 재혁에 대한 마음이 그러했다. 정착할 수 있는 마음도 부족해 역마살이라도 낀 듯 돌아다녔다. 파랑이 두 번째 어머니인 정희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다리가 먹히고 사라져있던 모습은 그녀의 역마를 막기 위한 작가의 트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 속에 찌들어가던 그들은 모두가 좀비가 되었고 파랑에 의해 삼켜졌다. 정확히 말해 머리가 으스러졌다. 즉, 소설의 좀비는 사회에서의 ‘악’ 혹은 ‘문제’고 파랑은 그러한 악을 물리치는 일종의 영웅인 것이다.

  반면 아영은 ‘입체적 인물’인 모양이다. 네 명 중 가장 자존감 없고 본인이 아닌 부모님의 틀에 맞춰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갸륵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본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K와도 기독교와 불교의 부닥침이라는 이유로 헤어졌던 아영이었다. 그런 그녀는 좀비가 나타나자 도끼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끝내 좀비가 된 본인의 부모님을 죽이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좀비의 출현으로 이전의 고통과 문제는 탈피하고 각성해 자유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이 주체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려낸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그 매개체가 ‘영웅 파랑’과 ‘사회의 악 좀비’라는 측면에서 작가는 “그만큼 주체가 되는 것이 힘들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또 도끼를 빼어든 아영의 모습에서 그 와중에 타인에게 가해질 고통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좀비로 변해버린 부모 셋은 사실 우리네 모습일지도 모른다. 특히 정희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세대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요즘의 사람들, 특히 필자는 끈기 없고 자신감 없는 매일을 산다. 먼저 나서기보다 주어진 일에만 반응하려고 하며, 그 주어진 일조차도하기 싫어서 매일을 끙끙댄다. 그러던 중 어젯밤에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무서운 꿈이라 함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사내의 꿈에 붙잡혀 영혼의 구렁 속으로 빠져들고야 마는 꿈이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친한 동아리 사람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다. 아침에 든 생각은 그 사내가 바로 나 자신이며, 내가 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큰늑대 파랑>을 읽으며 필자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나 자신이 이미 좀비에 감염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영처럼 깨어나는 것은 이미 늦은 걸까, 하는 고민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트릭에 보기 좋게 걸린 것처럼 ‘파랑의 필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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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보기 좋게 다음에 든 생각은, 내가 어쩌면 정희가 아니라 좀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요즘의 나는 내가 날 잡아먹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부러진 연필처럼 내 온몸은 다치고 있었다. ‘넌 재능이 없으니까 당장 때려치우는 게 좋겠어.’ ‘솔직히 감도 없잖아. 당장 때려치워.’ 도대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지? 나는 이따금씩 동기들이 부러웠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개인은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렇게 자괴하고 비교하며 썩어가는 나 자신이 어떤 의식도 가지지 않는,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좀비’가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좀비가 사람으로 돌아가는 영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혹은 좀비가 착하게 돌변하는 영화는? 역시 본 적이 없다. 나는 작가의 뜻대로 파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현실에서의 파랑은 무엇일까? 나의 성공? 나는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나 자신이 만든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다. 사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수도 없이 했다. 내가 봐도 나는 날 잡아먹고 있었다. 딱히 손가락질하는 사람 없어도, 오히려 따뜻한 손길을 건네도, 나 혼자 내 팔을 뜯어먹고 있었다.

  감기에 걸렸다. 바이러스는 좀비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내 몸으로 침투하고 있는 느낌이다. 작년 어느 날, 한강의 소설을 읽고 나는 이런 말을 썼다. ‘어제 가진 슬픔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큰 늑대 파랑’을 읽고 나는 이제 내 슬픔의 무게가 덜어질 수 있는 것일까 조금 고민하게 되었다. 내 파랑은 어디? 어떻게 찾지? 희망을 아직 품고 있는 나의 내면은 파랑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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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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