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들, 기억으로 더듬어 보는 일기장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3.09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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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사이 내게 가장 골치 아팠던 일은 노트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글을 쓰고 싶었든 쓰고 싶지 않았든 그 애와 몸을 맞대고 살을 비볐던 시간이 6년이었으니까. 싫으나 좋으나 지나치게 많은 종이를 썼던 건 사실이다. 시를 베끼고 말도 안 되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걸 추려서 버리려고 노력은 꽤나 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들춰 읽기 시작하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쁜 글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지긋지긋한 마음을 한번에 봉투로 묶어서 갖다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꼭 그럴 때마다 그 애들이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개를 버리는 파렴치한이 되는 것만 같다. 안 그래도 책으로 미어터지는 방에, 나는 바닥에 여기저기 노트를 늘어놓은 채로 살고 있다. 내 글과 내 과거에 대한 미안함을 가득 끌어안고.

  그리고 얼마 전, 엎어진 그 노트들을 치우다가 조악한 스티커 투성이인 작은 사이즈의 노트를 몇 권 발견했다. 그건 내 기억에 없는 노트였다. 분홍색에 케이크 모양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는. 한 장을 들추자마자 없애 뒀던 기억이 벌컥 떠올랐다. 3학년 때 친구들과 돌려 썼던 교환일기였다. 글씨를 그림처럼 찍찍 그어 놓고, 머리가 너무 큰 여자아이들을 그려 놓은 종이의 연속이었다. 반 아이들 대여섯 명의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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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을 떠올릴 일이 너무 드물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 게 있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던 주제에, 아주 오래도록 그 기억을 찾았던 사람처럼 나는 놀라고 기뻐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만났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실물적인 것이 없어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는 영화. '우리들'은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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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은 4학년이다. 늘 홀로였던 선에게 우연히 지아라는 전학생이 다가오고, 둘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둘은 멀어지고 틀어진다. 서로가 갖지 못 한 것 때문에, 혹은 서로가 가진 것 때문에, 또는 둘 다 갖지 못 한 것 때문이다. 영화는 그 튿어짐의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참 단순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아주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오래 묻어 뒀던 감정들이 스며나온다. 감정들이 잔잔하지만 섬세하게 다뤄져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사람이지만, 비슷한 미숙함을 거쳤다는 사실은 같다. 모두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 같다. 그 찡하고 찌릿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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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문득 그 교환일기가 떠올랐다.

  방으로 돌아와 서툰 글씨로 쓰인 일기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아주 어려운 책을 읽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졌다. 모여서 놀고 싶다. 내 생일 다음 주야. 선물 줘. 너는 왜 나랑 한 약속을 안 지키냐. 너 진짜 나쁘다. 학원 가기 싫다. 내용은 고작 그런 것이었는데 말이다.

  내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너무 그 기억이 멀게 느껴졌다. 나와는 다른 사람인 열 살 짜리 꼬맹이와 대화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 열 살 짜리 철부지 여자애는 불안해 보였다. 자기 차례인 일기장을 몇 차례씩 고쳐 적었고 모든 아이들의 글에 정성을 가득 담아 스티커도 붙였다. 같이 놀면서도 언제든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그 소박하고 치열한 감정들은 모든 아이들의 페이지 너머에서도 보였다. 그게 꼭 영화 속의 선을 보는 것 같고, 지아를 보는 것 같고, 보라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왜 그렇게 안쓰러웠을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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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쩍 자라 앞 자리 숫자를 갈아치운 지금의 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는다. 바쁜 이유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어떤 걸 먹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묻고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의 기분을 파악하는 일들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게다가 나는 어딜 가도 걸어서 다니니까 상대가 빨리 지칠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친해지기에 부적절한 사람이다.

  글을 쓰면서 더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물리적으로 원고지를 채울 시간이 필요하니까.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싫다는 얘기는 아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는 기쁘고, 즐거운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조차 나는 나 스스로를 지킨다. 선을 긋고 여기까지는 넘어오지 못하게 한다. 크면서 그런 습관들이 생겼다.

지금은 밥을 먹을 친구가 없어도 어딜 들어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시킬 줄 알고, 연락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혼자 책을 읽거나 할 수도 있다. 괜찮아졌고 좀 더 어른스러워졌다. 누군가와 싸우는 일도 없고 그래서 다치는 일도, 너무 멀어지는 일들도 없다. 나는 그냥저냥 괜찮은 리듬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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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친구가 내 세계의 전부일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지금은 그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그때는 그랬다. 혼자 동동거리고, 혹시 이 애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더 좋아할까 봐 무서웠고, 고집 같은 것을 피우면서 걔를 잡아 놓고, 서운한 게 너무 많아서 매일매일 싸웠다.

  지금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교환일기를 들춰 봤던 순간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왜 그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솔직하고도 조심스러웠던 순간들, 누군가에게 가닿기 위해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했던 시절, 단지 놀고 싶다는 이유로 내게 소중한 모든 걸 걸 수 있었던 때가 왜 자꾸 고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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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우리가 채웠던 노트들은 아이들에게 한 권씩 돌아갔다. 나에게는 그게 두 권 있다. 그 애들은 그걸 종종 읽고 있을까. 읽고 서로를 떠올리고 있을까. 그 아이들 중 한 명에게는 나쁜 말을 잔뜩 퍼부었고, 한 명에게는 아주 많이 실망해 내가 거리를 벌렸고, 한 명과는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사이가 됐다. 아마 길에서 마주친다면 아무와도 아는 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문득문득 그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들 잘 지낼까. 그때의 우리들은 시간 속에 잠겨서, 불안하지만 기쁜 순간들에 둘러싸여서, 잘 있는데.





※ 첨부된 사진의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임을 밝힙니다.


[김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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