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따지자면 난 <무성애자>에 속한다. 타고나게 사랑에 관심이 없어 당연히 드라마부터 소설까지 연애담에 관한 이야기라면 결국 지루함을 느끼고야 만다. 비단 나만 이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1인가구가 함께할 사람을 찾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한 지금 오히려 무성애자에 속하는 사람이 훨씬 더 늘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박한 삶에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로맨스를 찾기보다도 드라마 속에서 현실을 꼬집어 내는 일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변화가 썩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인생에 아름다운 시기를 이렇게 보내버리고 있는 내가 너무 안타깝다- 며 지인은 억지로 영화 한편을 주었다. 그렇잖아도 부족한 용량인데 그 속에 한자리를 차지한 로맨스 영화. 삶에서도 사랑에 대한 지분은 남겨두지도 않으면서 패드 용량에라도 조금 남겨둬 보라며 꾸역꾸역, 불평할 틈도 없이 넘겨받았다. 지금은 그 지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게 된 전혀 다른 두 남녀‘
낯선 이들이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다. 오히려 미래가 약속되지 않은 사이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대화를 터놓을 수 있다. ‘대화’는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남녀관계에서도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그리고 리처드 링클레이어 감독의 대화를 풀어내는 힘에서 감탄 할 수밖에 없다. 결혼, 남녀, 가치관부터 시작해서 죽음까지. 어떤 대화의 첫 시작이 [타인에게 느꼈던 첫 번째 성적인 감정 묘사]가 될 수 있을까? “‘신’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이에서 있을 것”이라는 셀린의 말처럼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는 어떤 하나의 진리가 있었고, 대화로만 이루워 진 남녀 사랑관계이상을 엿볼 수 있었다.
대화란 게 말 이외에도 행동, 눈빛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 진 만큼 제시가 셀린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려 하는 풋풋한 청년의 행동과 그런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는 셀린의 눈빛은 무게감 있는 대화 속에서 맘을 간질거리게 만든다. 누구라도 명장면으로 뽑을 레코드가게에서 노래를 듣는 씬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로망을 갖게 해 주었다.


<로망>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무언가를 꿈꾸게 해 주는 만큼 존재만으로도 사람에게 시너지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말 그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다. 시간이 지나 두 남녀가 작별을 언급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어른스러운 이별을 위해, 남은 화려한 시간을 위해 일찍이 작별인사를 하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을 때부터 관람객인 나조차 서서히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됐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하루 꼬박 밤을 새 서로에게 집중한 시간을 보냈지만, 당장 내일부터 서로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
기차 앞에서 겨우 1년 뒤의 약속을 잡고, 헤어지는 그 둘은 이후에 만났을까? <비포시리즈> 는 맘 잡고 궁금증을 풀고자 하면 언제든 해결 할 수 있지만, 잠시 이 로망을 머금고 음미 해 보고 싶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또다른 환상을 꿈꾸고 싶을 때가 오면 비포 선셋을 봐야 할 시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