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제목부터 심상치않다. 상당수의 지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줬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 '뭐야 그 오타쿠스러운 제목은' 이거나 '제목이 이상한게 보기가 싫다' 정도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의미는 이러한 익숙치않은 제목에 상당부분 내포되어있다. 일본 라이트노벨 특유의 문장형 제목을 패러디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제목이 영화를 상징하는 감독의 의도라고 본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제목에 있는 세 단어 '키리시마', '동아리활동' '그만둔다'로 나누어 진행하려 한다. 한 문장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처럼 한 영화를 세 가지 시선으로 보려고하니 그 시선마다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아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중복되는 부분이 바로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바이며 이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다.
키리시마
사실 영화에서 키리시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키리시마의 교내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의 의도적인 실종에 의해서 학교의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그의 여자친구는 그의 부재로 인해 공허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떠났음에도 그를 기다리는 행위를 지속한다. 키리시마가 활동하던 배구부는 침체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키리시마의 모습을 통해 많은 평론과 리뷰들은 학교 카스트 즉, 학교 내 계급에 대하여 논한다. 최상위 계급인 키리시마의 갑작스런 부재로 인해 그 하위 계급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부 친구들과 히로키와 그 친구들을 비교하며 최하위 계급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확실히 학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했었고 그건 어디에서나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급론적 생각이나 학교의 구조라는 생각으로만 이 영화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이 영화는 학교를 배경으로 했지만 학교만이 이 영화의 주제는 아니다. 이 영화는 청춘에 대한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키리시마를 교내 최상위계급으로 보지않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라고 본다. 학창시절에 흔히 생각하는 '크면 알아서 어떻게 되겠지'하는 그런 생각들말이다. 사실 영화에서 영화부 부장이나 야구부 선배를 뺀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큰 확신이 없다. 키리사마가 없어지기 전에도 등장인물들은 키리시마 즉 막연한 미래에 의존하는 삶을 보여줬다. 리사는 방과후 언제나 부활동을 하지않고 키리사마만 기다렸으며 히로키와 그 친구들도 농구를 하며 키리시마를 기다렸었다. 배구부는 언제나 키리시마와 같이 우승을 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장래희망조사서를 진지하게 작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히로키만이 잠깐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머지는 오히려 보자마자 접어버리거나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넘기기 일쑤다. 그런데 그 미래에 대한 근거없는 확신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 후 그들은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가 바로 히로키이다. 많은 등장인물 중에 사실상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히로키는 등장인물 중 가장 많은 갈등을 겪는 친구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구부를 그만두고 그냥 놀고있지만 아직 야구가방을 들고다니면서 야구부에 대한 미련을 아직 못 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엔 그저 방황하는 청춘의 정확한 모습이였다. 방황하는 등장인물들은 키리시마를 애타게 찾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 영화 막바지 그가 학교 옥상에 있는것을 발견하고 모두 그를 찾아 옥상으로 간다. 이때 옥상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옥상으로 집결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키리시마는 없어지고 난 후이다. 그들은 키리시마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키리시마가 없어진 후 그들의 삶은 너무 달라져버렸다. 키리시마의 부재로 인한 방황으로 그들은 너무 성장해버렸고 미래를 마냥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커버린 것이다.
동아리활동
동아리활동 혹은 부활동은 일본학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일본에 살고있지도 않고 일본인친구도 없어서 정확한 실상은 모르지만 일본의 청춘문화를 보면 학창시절 부활동은 매번 청춘문화에서 중요히 다뤄지곤 한다. 동아리활동은 우리나라처럼 취미의 발현일 수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좀 더 학생의 장래와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동아리활동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에는 동아리활동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여럿 보여주는데 이들 중 배구부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키리시마와 관련이 없거나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키리시마가 미래에 대한 근거없는 확신을 상징한다면 이들은 그런 확신을 갖지않는 듯이 보인다. 영화부 부장은 자신이 대놓고 말하듯이 자신은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저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교향악부 부장은 짝사랑에 실패하여 우울해지지만 이후 자신의 동아리활동에 집중하며 다시 웃어보인다. 깊은 슬픔마저 이겨낼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이 바로 동아리활동인 것이다. 히로키의 야구부선배 또한 3학년에는 동아리활동을 은퇴하는 관행을 뿌리치고 야구부활동을 하여 야구선수가 되려는 꿈을 가지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근거없는 확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그저 야구가 좋고 하고싶다는 열망의 발현으로 나타난다. 배구부가 앞서 말했듯이 동아리활동임에도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키리시마라는 에이스를 믿고 그저 우승을 확신했다라는 굴레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배구부를 제외한 동아리부원들의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그저 그것이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키리시마를 죽자고 쫓아다니지도 않으며 봤어도 그냥 지나쳐버린다. 그들이 미래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 그저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느낌으로 진로조사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키리시마를 쫓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기에 사는 느낌으로 진로조사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것이다. 그래서 히로키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히로키는 동아리활동과 비동아리활동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키리시마를 만나러 간 곳에서 키리시마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영화부 부장을 만나게 된다. 사실 키리시마와 영화부 부장은 정반대의 인물이다. 학교 카스트적으로 봐도 그렇지만 각자 상징하는 바를 보아도 그렇다. 한명이 청춘의 방황을 보여준다면 한명은 착실히 나아가는 청춘을 보여준다. 히로키는 키리시마(상징적이지 않은 인물 그 자체로서의 키리시마)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지만 영화부 부장과 미래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만다. 아마 그 눈물은 영화부 부장을 보며 동아리활동을 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까지의 자기 삶에 대한 반성과 옛날에 대한 그리움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옥상을 내려가며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건다. 이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지막 반항이다. 하지만 운동장의 야구부를 보게되고 영화에서 전화연결음보다는 야구부 소리가 점점 더 커지게 표현되는데 이것은 히로키의 마음이 점점 그쪽으로 굳어지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히로키는 이제 갈등을 멈추고 동아리활동으로 한발짝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 수 있다.
그만두다
이제 키리시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두번째 문단에서 이미 지겨울만큼 했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아직 이 인물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못했다. 키리시마는 배구부에이스에 여자친구를 보아하니 매우 잘생겼을 거라 추측이 된다. 인기 최절정의 이런 인물이 왜 홀연히 사라졌을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가 안된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동아리활동을 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그만둔 이유는 감히 추측하건데 그는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구부 에이스지만 배구를 안 좋아했을 수 있다. 사실 영화에서 비춰지는 배구부는 배구자체를 좋아하게 되기 힘든 곳이다. 배구부들은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매우 강도높은 훈련을 하는데 이런 배경에서 배구가 좋아서 동아리활동을 하는 것은 힘들다. 키리시마는 좋아하지도 않는 배구를 계속해야 하나 하는 갈등을 계속 했을 것이고 그 결과가 '그만두기'인 것이다. 이렇게 키리시마는 청춘의 방황이라는 이차적 상징을 가지게 된다. 앞 문단에서 키리시마를 방황으로 종종 해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키리시마의 방황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착한 방황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친구들은 미래에 대해 생각도 안하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키리시마는 자신의 미래,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며 방황을 시작한다. 이것은 발전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도기적 시련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만둔다'는 일종의 성장통이다. 청춘은 이런 성장통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히로키도 그럴것이고 키리시마 또한 자신이 원하는 '동아리활동'을 찾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솔직히 이 영화는 이 정도에 그쳐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다 개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내 글이 그걸 다 표현해내지 못해 난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내 글솜씨가 그리 좋지 않아 아마 독자들은 저 세문단에서 중복되는 부분이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조악한 글솜씨 가운데 찾은 공통점이 있다면 맞다. 제목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것은 방황하는 청춘에 대한 것이였다. 청춘은 방황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미래에 대한 낙관이 없어져 방황하고, 좋아하는 게 없어 방황하고, 그게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기도 한다. 방황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어조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보듯이 방황은 성장을 위한 시련이다. 나 또한 약간의 방황을 한 적이 있다. 그 방황으로 난 좀 더 성숙해졌다고 난 생각한다. 게다가 난 아직도 청춘이다. 사실 청춘의 기준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난 지금의 청춘들이 방황을 한번 해봤으면 한다. 방황이란게 키리시마같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지거나 아무것도 안하며 살아가기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보며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좋은 길인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방황이 될 수 있다. 이런 방황을 통하여 자신의 '동아리활동'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이상 키리시마가 아닌 영화부 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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