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7] 청혼2

글 - 최 정 란
글 입력 2016.02.0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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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7

청혼 2

글 - 최 정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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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otographer : Angela Lyons Photography)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그는 드물게 유쾌한 사람입니다. 어떤 진담도 농담으로 바꾸는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어떤 침울한 자리도 금방 떠들썩하게 만들지요. 그는 아무래도 진담보다 농담에 재능이 있습니다. 

마지막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 그를 배웅합니다. 책무더기 짐과 함께 그가 조수석에 올라탑니다. 파란 일 톤 트럭이 내뿜는 배기가스 속에 남은 우리는 늦게까지 학교 뒤 골목을 돌아다닙니다.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아. 다른 곳으로는 다 가더라도. 맹세처럼 입에 달고 살던 곳으로 제 발로 돌아가다니요. 의외의 선택입니다.

스터디그룹이 해체됩니다. 제각기 당면한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를 씁니다. 비틀거리는 저마다의 미래를 어떻게 하든 바로 일으켜 세워야합니다. 누구를 살필 경황이 없습니다. 

곧 그의 결혼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름다운 신부는 그가 입에 올리는 순간 순식간에 그를 빛나게 만들던 첫사랑이 아닌,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지역신문에 그의 죽음이 보도됩니다. 

그를 태운 모터사이클과 함께 그가 세상의 굽은 비탈길 밖으로 길게 미끄러졌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언니가 심드렁하게 말합니다. 어떤 악령이 그를 불렀을까?

무엇엔가 이미 묶여 있던 그를, 더 이상 이 세상에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고. 어쩌면 그를 세상으로 내보낼 때 운명이 그의 생의 발목의 밧줄을 일부러 느슨하게 묶었을까요. 그에게 피와 살을 주고 그를 길러낸 이 땅이 그를 이 시대의 바깥으로 뛰어내리게 만든 번지점프의 플랫폼이었을까요. 

사람과 시대와 장소가 삼위일체로 잘 맞는 맞춤옷처럼 태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겠지만, 그는 시대와 장소 어느 쪽과 결정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던 걸까요. 혹은 둘 다 일까요. 어떤 사람과 치명적으로 어긋나는 시간과 장소는 또 어떤 아이러니인지요. 

그는 자신의 얼마나 작은 부분만 보여주고 떠난 것일까요. 나는 입속을 맴도는 혼잣말들을 삼킵니다. 그의 농담 같은 청혼이 어쩌면 살려달라는 SOS 아니었을까요. 결혼이 생의 가파른 절벽에 매달린 그가 필사적으로 잡은 밧줄 아니었을까요. 

지금은 다만 그의 짧은 생이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던 운명의 절벽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의 청혼은 굳이 실없는 농담의 모습이어야 했을까요.  왜 꽃덤불같은 향기로운 추억 대신, 단물 빠진 껌 같은 농담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가야 했을까요. 

그 가벼운 농담이 그 순간 어쩌면 가장 절박한 진담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생과 사가 걸린 진담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이고 약간의 수치심까지 느끼다니, 나는 또 얼마나 가벼운 사람인가요. 

무거운 삶의 지루한 맥락에서 순발력 있는 농담처럼 날렵하게 그를 낚아챌 수도 있었는데. 죽음이 따라오지 못하는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가 몰래 숨겨줄 수도 있었는데. 누군가 한 사람을 살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그 농담은 너무 지루해요. 낡아빠진 농담은 지루한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지도 몰라요. 
( the E )




최정란 (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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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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