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문학의 역사Ⅲ-청교도혁명에서 명예혁명까지(1)[문학]

급변하는 정치와 사회,사람들...그리고 문학
글 입력 2015.12.08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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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의 역사Ⅲ

The Commonwealth and Restoration (1)
1649 –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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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고 근대 사상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1640년대 영국. 이제까지 ‘신이 내려준 분’이라 여겨지던 국왕은 민중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왕좌에서 끌어내려지기에 이른다. 근대적 시민의식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간 시대, 급변하는 사회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당대의 많은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1. 혁명의 연속



- 청교도혁명 

 15세기 중·후반에서 16세기 초까지, 영국의 정치상황은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1640년대에 이르러 청교도의 의회당(The Puritans)과 영국 국교회를 따르던 왕당원(The King’s Followers)이 대립구도를 형성하는데, 이 둘의 갈등이 촉발되며 일어난 사건이 바로 혹은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 1642-1651)이다.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이라고도 불리는 청교도혁명 도중, 1649년 절대군주정을 고집하던 찰스Ⅰ가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처형된다. 이후 크롬웰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연합한 ‘Commonwealth and free state’를 선언함으로써 영국의 연방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공공의 선’이라는 뜻의 코먼웰스는 특정 계급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행복을 주창하는 영국연방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영국 연방을 통치하는 호민관(호국경, Lord Protector)이 된 크롬웰은 군사정치로 공화정을 펼쳤지만 점차 그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거세지고, 타락한 공화정 이전의 왕정이 차라리 더 나았다는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가 죽은 뒤,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었지만 9개월 만에 군부의 반란이 일어나 사임되었다.   


- 왕정복고

 1660년, 의회의 결의에 따라 프랑스로 피신했었던 찰스Ⅱ세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는 ‘왕정복고(Restoration)’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교도 혁명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의회당이 휘그당(the Whigs)과 토리당(the Tories)으로 나뉘어 의회를 열었다. 따라서 이전의 절대왕정과 다른 의회군주제의 정치형태를 갖춘다.


- 명예혁명

 찰스Ⅱ세 사후 즉위한 제임스Ⅱ세는 강력한 카톨릭(구교) 부활정책을 펼치고 이에 반대하는 청교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청교도(신교)위주의 의회는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과 메리 부처를 왕좌에 앉힘으로써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을 이루어낸다. 이제 카톨릭 군주의 즉위는 전면적으로 불가능해졌으며 왕은 의회의 동의 없는 권력의 행사가 금지되었다. 단 한 사람의 피도 흘리지 않고 이루어진 시민혁명으로 비로소 영국은 안정을 되찾는다.



2. 정치와 시인, 그리고 존 밀턴



 거듭된 혼란 속을 지나온 사람들은 또 다른 혁명의 재발을 회피하려 하였고, 안정감에 대한 강력한 욕구는 상업성장을 이끌었던 중간계급에서 더욱 크게 나타났다.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은 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이었다. 성서 <욥기>에 나온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은 전체주의적 국가, 즉 영국연방(코먼웰스)을 상징한다. 이기적인 개인을 강력한 국가가 완전히 통제하기를 바라는 왕정복고 이후의 영국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문학에 앞서 영국의 정치사를 설명한 이유가 있다. 군주를 직접 처형하고 공화정을 이끄는 호민관을 뽑았다가 다시 왕정을 복고시킨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 정치상황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저 왕을 섬기던 이전과 달리, 이제 민중들에게 정치 지도자를 고를 권한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시인들은 정치적 견해를 시를 통해 드러냈다.

 1649년 찰스Ⅰ세가 처형된 이후부터 1660년 찰스Ⅱ세가 왕정을 복고시킨 때까지, 호민관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공화정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개인보다 전체를 강조했던 이 시기, 문학계에서는 유례없이 정치성이 강조되었다. 당시의 주요 시인으로 먼저 앤드루 마블을 소개한다.



앤드루 마블
[ Andrew Marvell ] 

영국 시인. 라틴어 비서관으로서 밀턴을 도왔으며
고향인 헐에서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왕정복고(王政復古) 후, 익명으로 정치적 풍자문서를 발표하여 
궁정과 의회의 지도자를 통렬히 비판했다.



 앤드루 마블은 시 《크롬웰의 에이레로부터의 귀환에 부치는 노래,1650》에서 크롬웰을 국가적 영웅으로 찬양한다. ‘가장 위대한 정치시’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를 지지하는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으며, 정계의 부패와 전원적 풍경을 대조적으로 나타냈다. 이 시로 마블은 크롬웰의 비공식적 계관시인(Poet Laureate)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보다는 기존 체제의 ‘안정’을 추구했고, 끝내 왕정을 복고시켰는데 이를 영국의 후기 르네상스(Post-Renaissance)라 보기도 한다. 영국의 르네상스였던 골든 에이지에서부터 후기 르네상스까지를 잇는 시인으로는 존 밀턴이 있다. 영국에 벌어졌던 모든 혁명과 변화들을 지켜본 시인 밀턴은 정치적 변화와 작품, 그리고 시인의 삶이 맺는 연관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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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밀턴
[John Milton, 1608-1674]

런던의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
금욕주의적 신앙을 강조한 청교도 시인이자, 서사시 《실낙원》(Paradise Lost)의 
저자로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의 대시인으로 평가된다.



 공화정 하에서 크롬웰의 비서로 활약한 밀턴은 이후 시력을 잃어 ‘실명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라틴어로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시들을 써냈던 초기와 달리, 이후에는 영어로 쓴 서사시 《실낙원, 1667》을 12권에 걸쳐 발표하는 업적을 남겼다. ‘신은 인간을 돌봄과 동시에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는 주제를 가진 이 시는 기독교적 이상을 지지하는 종교문학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 17세기 후반, 존 번얀(John Bunyan)은 영문학에서 가장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천로역정, 1678》이 발표하기도 했다. 기독교도라면 한번쯤 읽어보았을 이 작품은 꿈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줄거리를 우화적 방법으로 쓰였으며, 사회의 거짓된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기독교적 가치를 강조했다.



3. 신고전주의(융성기) 그리고 풍자시



 신고전주의(Augustans)란 로마 문화의 정점에 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에서 온 것인데, 영국 문화도 아우구스투스 때의 로마 문화처럼 융성하기를 바랐던 데에서 유래했다. 신고전주의 작품들은 감정보다는 이성에 기초한 사고를 중시하였기에 이 시기의 다른 종교적 작품들과는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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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멋
[ John Wilmot, 1648-1680 ]

영국 형이상학파 시인. 제2대 로체스터 백작으로서, 찰스 2세의 궁정에 출입한 재인(才人)들의 중심인물이다. 고전고대(古典古代)의 시에 바탕을 둔 지적인 시풍을 보이면서도, 퇴폐적인 풍속을 가미한 사랑의 권태와 회한을 노래하였다. 연애시 외에 《무(無)에 대하여》라고 하는 이색적 명상시(瞑想詩)와 인간불신의 풍자시 등의 가작도 남겼다.



 방탕한 백작이었지만 죽기 직전 가톨릭(구교)신자가 된 존 윌멋(John Wilmot)은 경험을 바탕으로 쾌락의 이중성과 참된 도덕성에 대해 예증하고자 하였다. 그의 익살맞고 거친 시는 삶 속에서 맞는 기쁨을 찬양하는 동시에 사회와 인간 그 자체가 갖는 모든 요소들을 비꼼으로써 신고전주의 융성기 최초의 풍자시를 남겼다. 풍자시(Satire)는 재치있는 형식을 취하며 실존 인물과 실제 상황을 사용하여 해학성을 강조한 시로, 주로 시대의 종교적, 학술적, 정치적 주제에 대하여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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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드라이든
[ John Dryden, 1631-1700 ]

영국 시인, 극작가 겸 비평가. 왕정복고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빗대어서 왕에게 적대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공격하였으며, 뚜렷한 인물묘사가 풍자를 더욱 통렬히 표현하였다.



 17세기의 주요 문학인이었던 존 드라이든은 주로 도덕적 교훈을 전했던 왕정복고 이후 풍자시의 대가였다. 시인이자 극작가, 그리고 수필가로서 당대의 종교와 정치적 이슈에 주목한 풍자시들을 남겼는데, 앞서 말한 윌멋이 일반적인 인간을 풍자한 것과는 달리 드라이든의 풍자시는 특정한 인물, 즉 개인을 풍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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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기에 걸쳐 정치 지도자 여러 명이 등장했던, 엄청난 격동의 시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끝없는 내전으로 불안정한 국가에서 사람들은 강력한 리더를 원했고, 혹은 황금기를 맞았던 전 시대를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었다. 시인들도 이에 동참함으로써 ‘신고전주의’를 열었으며, 계속되는 사람들의 싸움을 신의 도움을 받아 멈추고자 종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도 했다. 

 하룻밤 사이에도 급변하는 정치와 사회, 그리고 사람들. 문학사에서도 그러했다. 누군가는 이에 지지하는 정치시를 써서 ‘가장 위대한 정치시를 쓴’ 계관시인이 되었고 다른 이는 안정성을 잃어버린 인간사회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풍자시를 씀으로써 계관시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즉 정치와 문학 또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뿐만 아니라 시대의 주류 장르까지도 정치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다음은 왕정복고기의 Drama에 대한 글이 될 것이다. 희극과 비극은 이때의 시대상황에 맞추어 어떤 작품을 내놓았을지 궁금해진다. 정치적 변화에 수용하거나 불복하는 내용이 희극이나 비극 어떤 형태로 오든지 간에 흥미로운 장르가 될 것이다. 다시 돌아온 Drama는 과연 황금기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지 기대해보자. 


<참고문헌>
The Penguin Guide to Literature in English: Britain and Ireland, ed. Ronald Carter and John McRae (Pearson Longman, 2010) ISBN: 978-0-582-46567-1


<인물정보 및 사진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 앤드루 마블 [Andrew Marvell]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0552&cid=40942&categoryId=33449)

2. [네이버 지식백과] 존 밀턴 [John Milton]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7211&cid=40942&categoryId=34424)
사진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96824&cid=41773&categoryId=44395

3. [네이버 지식백과] 윌멋 [John Wilmot]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2031&cid=40942&categoryId=33446)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shanol?Redirect=Log&logNo=168661838

4. [네이버 지식백과] 존 드라이든 [John Dryden]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5414&cid=40942&categoryId=33449)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ohn_Dryden_portrai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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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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