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한가지 모순이 있던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대학교 올라오기까지 단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사실 대학교 올라와서 무라카미 하루키란 이름을 제대로 접해봤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젠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 보려고 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의 소설을 보면 '나도 소설 쓸 수 있겠는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당히 집 근처에 있는 교*문고에 가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코너로 간다음
가장 얇은 책 한권을 빼냈다. 
(단편이 재밌으면, 장편도 재밌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유명한 작가의 책중에 단편을 먼저 읽는 습관이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jpg


  책의 커버도 정말 내가 좋아하는 색감에, 딱 '저 문학작품이에요'라는 
느낌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하루키는 문학작품의 요소가 없는 느낌이지만)
이는 총 150페이지로 구성되어있으며, 1시간~1시간 30분 안에 적당히
하루키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첫장을 펼쳐서 보여진 내용은 그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뭔가 흥미롭지 않은가? 정말 쓰고 싶어서 소설 썼다는 그의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
일단 나는 문학작품을 해석과 평가로 전문적이게 비평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나의 생각으로 글을 쓰려한다.
(사실 이러한 느낌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도 비평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를 '쁘띠비평가'라 한다는 소리를 교수님한테 들은 적이 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내 스타일의 책은 아니다.
조금더 한마디로 줄이자면 재미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큰 요소가 있다면,
재미없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읽힌다는 것에 깜짝놀랐다.
안읽혀지는게 맞는데 왜 읽혀질까? 라는 의문점이 생기면서 계속 읽어난간 걸로 기억한다
하루만에 다 읽긴 했지만, 작품의 재미보단 이 작가 특이하다 라는 인상이 더 강했다.

  내용을 말하자면, 핵심이 없었다. 이토록 핵심이 없는 작품일줄은 몰랐다. 
내가 아직 작품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책을 다 읽고 핵심을 기억하는 편인데. 
전혀! 핵심을 모르겠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무언가가 쓰고 싶어져서 썼구나” 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본능에 충실할 줄이야. 
그렇지만 대단하다. 
쓰고 싶다고 해도 정작 쓰는 사람을 못봤는데
이렇게 한권을 발행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단련되지 않은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문장력이 뛰어나다.
일단 이 자체로도 책을 읽는 것에 큰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스토리에 내용은 그 다음의 일이다. 나는 스토리가 재미있어도 글을 못쓰면 읽기 싫다. 
-그럴일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특히 내가 좋아하는 문체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하루키의 작품은 내게 딱 맞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어본 하루키의 등장인물들은 너무 개성넘쳤다.
일단 주인공부터 너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의 친구인 ‘쥐’(별명)가 작품을 재밌게 만들어 준건지도 모른다. 
처음 쥐라는 등장인물이 나왔을 때 ‘쥐’같은 사람이라서 쥐라고 부르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점갈수록 하루키의 내면적 존재가 아니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장에서 하루키가 이 소설을 쓰게된 계기를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라는 그의 말처럼 ‘쥐’도 소설을 쓰려한다. 
하루키도, 쥐도 갑작스럽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예전부터 소설쓰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실천에 옮긴 것 이다. 
쥐를 하루키에 내면이라고 생각한 후에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내가 하루키의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본거라 할 수 있는 질문인 것 같다. 
‘쥐’는 섹스도 없고, 한명도 죽지 않는 소설을 썼다고 했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진짜 섹스장면이 없고, 등장인물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은 내 질문에 또다른 질문을 던질 것 같다. 
<하트필드>는 죽었다 라는 것을. 
<데릭 하트필드> 그는 가공의 인물이다. 
-이 사실을 알고 허무하게 끝났던 하루키의 소설이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왔었지.-
 하트필드를 등장인물로 생각하기에는 ‘미심적’다고 생각한다. 
하루키가 그를 통해 글을 배웠고, 
정말 실존인물처럼 그려넣었던 하트필드는 ‘죽었다’ 라고 설명했는데, 그게 다다. 
스토리상에서는 나오지 않고 처음과 끝을 장식해주는 인물로만 나온다. 
아직까지도 왜 이런 장치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하트필드를 제외하고 하루키의 소설을 본다면 ‘쥐’가 쓰는 소설인 섹스장면없고, 
등장인물은 죽지 않은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이 아닐까도 짐작해본다.
‘쓰고 싶어져서 썼다’ 라는 말이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누가알까? 
나는 이 말이 어려운 말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놀러갈때도 정확한 시간과 약속을 잡고난 일이 아닌이상은 
그냥 놀러가고 싶다. 라는 기분으로 놀러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 나아가 “등산하고 싶은 날씨네” 라고 생각한 사람이 산을 타는 가능성은 몇 퍼센트나 될까?
그가 첫장에 불현 듯 쓰고 싶어서 썼다. 
라는 이 말은 큰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생각했고, 그 생각을 실천하여 실체를 얻었다. 
물론 그가 최선을 다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행한만큼 얻는 것이 있다는 증거가 존재하니까 대단하다고 느낀다. 
생각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누구나 어렵다. 
쉬운일이라고 생각할 듯 하지만 쉽지 않다. 
나도 여러일을 겪었고, 실제로 생각을 실체로 낳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하지만, 나도 작가처럼 노력하고 있다. 
생각을 실체로 만드는 일이 어렵지만, 모든 사람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끝까지 하면 될꺼라 생각한다. 
하루키도 글을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18일동안 실행에 옮겼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실체를 낳았듯이, 
나도 내 인생에 있어서 생각을 실천한 증거가 생기길 바란다. 
아직 내겐 하루키처럼 증거는 없지만 만들어갈 생각이다. 
분명 나도 불현 듯 하고 싶은 것이 생길 것이다. 
그럼 그처럼 해야지 그리하여 100% 얻는 것을 얻고 살 것이다. 
그게 아직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살다보면 하루키처럼 불현 듯 무엇인가를 하고 싶겠지. 
그리고 나는 지금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길 원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뒷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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