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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예능
[Opinion] 신이 주신 긴 휴식, 롱 베케이션 [드라마/예능]
여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꿈만 같이 느껴질 정도로 아득하다. 타고나길 겨울에 시들시들해지는지라, 한겨울이 오면 그렇게 난감해졌다. 추위가 지독해지면 억지로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을 찾아 닥치는 대로 폭식하기도 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미덕인 걸 알고 있지만, 고작 네 개 있는 계절 중에서도 편식을 일삼으니 그냥 ‘줏대 있게 하고 싶은 걸 했다’고 잘 둘러대고 싶다. 그런 이유로 에디터는 한겨울에 처음 접하게 됐지만, 대게 많은 사람들은 초여름을 맞으며 이 작품을 찾는다. 5월, 녹음이 푸르고 이제 곧 반소매 하나 입어도 춥지 않은 날씨가 전국을 덮칠 것이다. 그럼 또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는 기온과 습도가 우리를 괴롭힐 테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이 무더위가 이어질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롱 베케이션 ロングバケーション>(1996)의 계절이 돌아왔으니까. 야마구치 토모코,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1996년 작 일본 드라마 <롱 베케이션>은 방영 당시에도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에도 일명 ‘롱베케’ 열풍을 일으켰던 화제작이다. 인생에서 뭘 해도 안되는 시기인 ‘롱 베케이션’을 지나고 있는 두 사람, 세나(기무라 타쿠야분)와 미나미(야마구치 토모코)가 우연한 기회로 한 집에 살게 된다. 90년대 일본 문화와 당시 남녀의 애정 문화를 가벼운 초여름 향기를 통해 담아낸 드라마는 당시에는 전반적인 공감을 자아내며 인기를 모았고, 30여 년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추억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시청자층에게 사랑 받아오고 있다. 겪어본 적 없는 30년 전 도쿄의 여름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찌질한 시기를 맞은 두 청춘이 서로에게 닿을 듯 말 듯한 사랑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때의 여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미나미는 ‘미스 재팬’이 아닌 ‘미스 나가라가와쿠다리’ 출신으로 모델 생활을 이어왔지만, 31살이라는 나이와 변변치 않은 경력에 부딪혀 생활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결혼식을 앞둔 당일, 신랑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일본의 전통 혼례복을 입은 미나미가 급하게 약혼자였던 아사쿠라와 그의 룸메이트 세나가 함께 사는 집으로 찾아가지만, 이미 약혼자는 다른 여자와 함께 짐을 싸서 없어져 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세나와 미나미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세나는 일본예술대학에서 졸업을 앞둔 24살 피아니스트로, 콩쿠르에서 연신 미끄러지며 피아노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연주에 감정이 부족하다’라는 평을 받으며 꿈에 대해 좌절하고 고민하던 순간 미나미를 만났다. 갈 곳 잃은 미나미가 무작정 세나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찌질한 두 청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짝이 맞지 않은 빈티지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고, 모델 일을 그만두고 지원하는 면접에서 족족 떨어지는 미나미의 털털하고 진솔한 모습. 특히 나조차도 나를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면접에서 떨어져 있는 그대로 흔들리는 모습의 미나미가 저릿한 마음 한편을 내비치는 장면은 세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피아노를 그만두려고 하는 세나의 등을 콩쿠르 쪽으로 다시 밀어주며 넥타이를 사주는 순간에도 그렇다. <롱 베케이션>은 세나와 미나미 외에도 세나가 짝사랑하던 대학 후배인 료코와 미나미의 남동생 신지가 함께 엮여 복잡한 애정선을 만들어내며 청춘남녀의 초여름 무더위 같은 사랑을 잘 드러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받쳐줄 수 있는 존재를 짝으로 맞이하게 되는 결말은 ‘롱 베케이션’을 끝낸 청춘이 궤도에 진입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만도 같다. 신지: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사람은 날개가 있어. 날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날고 싶어도 못 날아. 미나미: 아니야. 세나씨는 세상에서 제일 큰 날개를 가졌어. 신지: 그런 건 사랑 고백이야. -9화, 신지와 미나미의 대사 중. 2026년은 ‘역대급 여름 더위’가 예상된다고 한다. 아마 질기도록 덥고 뜨거울 것이다. 언젠가 우리에게 찾아올 ‘롱 베케이션’처럼, 혹은 지금을 지나고 있는 순간이 ‘롱 베케이션’인 것처럼. 길을 영영 잃은 것처럼 방황하더라도 괜찮다. 초록의 계절에 힘입어 조금 헤매는 것조차도 오늘의 과업이라고 착각해 볼까. 길고 긴 ‘롱 베케이션’에서 비로소 서로를 만난 세나와 미나미처럼, 내게 맞는 길을 찾을지 모를 일이다.
여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득하다. 타고나길 겨울에 시들시들해지는지라, 한겨울이 오면 그렇게 난감해졌다. 추위가 지독해지면 억지로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을 찾아 닥치는 대로 폭식하기도 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미덕인 걸 알고 있지만, 고작 네 개 있는 계절 중에서도 편식을 일삼으니 그냥 ‘줏
by
정현승 에디터
2026.05.08
작품기고
The Artist
[那의여백] 어른이 되는 여름, 르누아르
아이들은 언제 어른이 되는가
ILLUST by. 유나 11살 ‘후키’가 세상을 알고 쑥쑥 자라나는 1980년 어느 여름 방학의 이야기를 담은 2026년 봄, 언젠가 아이였고 어른이 된 우리에게 왠지 반가운 <르누아르>
by
노유나 에디터
2026.05.01
오피니언
문화 전반
[Opinion] '살목지' 200만 돌파, 넷플릭스 '기리고' 글로벌 4위 - 공포를 소비하는 계절 [문화 전반]
왜 우리는 기꺼이 무서워지는가
여름이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 계절과 함께, 귀신도 돌아왔다. 극장가에서는 〈살목지〉가 개봉 20일 만에 2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손익분기점(80만 명)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스트리밍 시장에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기리고〉가 공개 사흘 만에 글로벌 랭킹 4위, 13개국 1위를 석권했다. 매년 이맘때면 벌어지는 풍경이지만, 올해는 유독 뜨
by
정가은 에디터
2026.04.30
오피니언
문화 전반
[Opinion] 미화의 계절이 다가온다 [문화 전반]
여름이 다가온다. 어김없이 또 아름다운 초록빛에 속을 시간이다. 이제는 무더위에 흘릴 땀도 기대되기 시작한다.
걸어가면서 길가에 보이는 초록색이 눈에 띄게 많아진 걸 느낀다. 여름이 다가온다. 여름은 다른 계절들에 비해 미화의 특성이 강하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계절과 함께라면 머리가 아프도록 더웠던 날씨도 땀을 잔뜩 흘려 찝찝했던 기억도 다 아름답게 남곤 한다. 개인적으로 비와 더위를 정말 싫어해서 여름을 그닥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첩을 보면 초록색이 가
by
김세진 에디터
2026.04.30
리뷰
영화
[Review] 도망치듯 달려나가는 세 소녀의 여름: 영화 "올 그린스"
무모하지만 간절한 세 소녀의 계획은 실패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청춘의 에너지를 닮아 있다.
"올 그린스"는 답답한 시골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한탕을 꿈꾸는 세 여고생의 이야기를 그린 청춘 크라임 영화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음 붙일 곳 없는 히데미, 예쁘고 쾌활해 보이지만 말 못 할 사정을 지닌 미루쿠, 꿈과 재능의 갈림길에서 좌절하는 이와쿠마는 각기 다른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이들은 현실을 견디는 대신, 거금을 만들어줄 ‘초록’을 통해
by
정충연 에디터
2026.04.26
오피니언
영화
[Opinion] 때때로 젊고, 때때로 성숙한 - Jone, Sometimes [영화]
스페인 빌바오의 풍경을 담은 독립영화 'Jone, Sometimes'를 다룬다. 영화는 20대 초반 Jone의 사랑과 아픔, 그리고 성장을 다룬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K와 각자의 20대 중반 시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느꼈던 감정, 힘들었던 일들, 최소 40대가 될 때까지는 기억할 듯한 도파민(?) 가득한 사건들을 주고받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요즘 들어 이런 ‘옛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늘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는 생각보다 과거의 나는 상당히 어렸다는 것이고, 또 하
by
정진형 에디터
2026.03.31
리뷰
공연
[Review] 나의 삶을 완성하는 것은 미완성 - 삼매경 [공연]
삼매경에 빠진 자들
<삼매경>. 쉽지 않은 공연이 될 거라고 여겼다.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대략적으로 알 수 있듯이, 극은 과거와 현재, 무대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뿐만인가. 한 사람에게서 두 가지 이상의 내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방대함 때문에 불교적 지식조차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과연 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 두려워졌던 게 사실이다
by
허희원 에디터
2026.03.27
리뷰
공연
[Review] 삶이 무대에 붙들리는 밤 - 연극 '삼매경' [공연]
삶이 무대에 붙들린 한 배우의 이야기. 잘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느끼면 된다.
극장에 들어선 건 공연 시작 10분 전이었는데, 배우들이 이미 무대 위에 있었다. 뱀, 토끼, 나무가 되어 온몸으로 자연의 소리를 내며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객석의 불도 아직 꺼지지 않았는데. 불경 소리가 섞여 흐르는 공간 속에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누군가의 깊은 무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삼매경>은 함세덕의 고전
by
권현정 에디터
2026.03.21
칼럼/에세이
에세이
[에세이] 나, 모든 간절기 좋아하네
살갗에 느껴지는 따뜻함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계절의 변화가 슬며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쓰는 시점에서 당연히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란 봄이다. 살갗에 느껴지는 따뜻함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나는 예전부터 특정 계절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때보다는 계절의 변화됨이 느껴지는 소위, 애매한 간절기의 계절을 더 좋아해 왔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계절이 분명한 때엔 살아 내는 것이 힘들기 때문
by
이유빈 에디터
2026.03.02
오피니언
도서/문학
[Opinion] 불이 타는 언덕 [도서]
푸른 언덕을 태우지 않는, 불길 없는 불의 시.
때때로 시인은 이미지를 비틀어 쓴다. 부드러움에서 날카로움을 드러내거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움을 떠올린다. 대상의 속성에 대한 전복은 사물의 이면에 다가가려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이거나, 뒤틀린 현실을 반영하는 사나운 직언이다. 그러한 시인의 시도는 오직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두 가지의 첨예한 선택지만을 가지게 될 테다. 그러나 사물의 속성에 대한 완전한 전
by
차승환 에디터
2026.02.12
오피니언
도서/문학
[Opinion] 여름과 고독과 빛과 삶 – 아름다운 여름 [도서/문학]
La Bella Estate
그 시절의 삶은, 마치 끝도 없는 축제 같았다. 집을 나서 길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곧잘 제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죽도록 피곤에 절어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했다. 불이라도 나 주기를, 집 안 어딘가에서 아기가 태어나 주기를, 아니면 느닷없이 새벽이 찾아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기
by
이지혜 에디터
2026.02.04
리뷰
PRESS
[PRESS] 내 마음속 무정한 검사 옆 따뜻한 변호사 - 나는 왜 작은 실수에도 이렇게 힘들까 [도서]
자기 자비의 구체적인 의미는 결국 '자기 신뢰'라는 것을.
책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앗, 내가 딱 바로 그런 사람인데' 하면서 말이다. 아트인사이트 플랫폼에 글을 기고하고 그 글이 송출되기 시작한 지도 1년이 훨씬 넘었다. 글을 제출하기 직전까지도 나는 오타가 없는지 분명 꼼꼼히 확인했다. 그런데 꼭 송출되고 난 후에야 한 글에 한두 개씩 오탈자를 발견하고야 만다. 오타가 발견될 때면 심장이 움찔거리고 아
by
이유빈 에디터
202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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