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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의미를 잃은 세대는 어디로 가는가 - 죽음의 수용소 이후

빅터 프랭클의 실존분석으로 읽는 청년의 불안과 정치적 분화

by 신동하 에디터
2026.07.14 14:34

 

 

# 글을 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질문조차 사치처럼 들리는 시대다.


사회로 들어가는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진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맡을 역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는다. 방향을 잃은 사람은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집단 정체성에 기대고, 때로는 타인을 적대하는 흐름에 올라탄다. 따라서 오늘의 위기는 물질이 부족해서만 깊어지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잃을 때 더 깊어진다.


이 문제를 평생 파고든 사람이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1905–1997)이다. 빈대학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 일한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거쳐, 의미를 치료의 중심에 둔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테레지엔슈타트와 아우슈비츠, 다하우 등 나치 강제수용소를 전전했고, 그 과정에서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 그는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을 대표작 『죽음의 수용소에서』(1946)에 담았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를 붙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바로 수용소 체험에서 나왔다.


최근 출간된 유고집 『죽음의 수용소 이후』(유영미 옮김, 북하우스, 2026)는 프랭클의 확신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어떻게 성숙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은 프랭클 문서 보관소에 남아 있던 미공개 자료 가운데 1946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한 강연과 인터뷰 네 편을 골라 엮었다. 1955년 강연에서는 전후 사회가 겪은 집단 신경증을 진단하고, 1984년 강연에서는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수용을 다룬다. 네 편의 글은 수용소 체험 ‘이후’의 프랭클이 시대의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지를 보여 준다.


이 글은 이 책을 길잡이로 삼아 프랭클의 실존분석을 세 가지 질문으로 읽는다.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인간은 의미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그리고 의미는 어디까지 유효한가. 마지막으로 이 질문과 답을 오늘의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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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좇는가. 프로이트는 쾌락을, 아들러는 우월성을 인간 행동의 중심 동기로 보았다. 그러나 프랭클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을 ‘의미를 향한 의지’라고 불렀다. 인간은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실현하려는 성향을 지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은 내면의 만족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물으며 살아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의미를 향한 의지를 인간의 본성으로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의지가 꺾이면 ‘실존적 공허’가 찾아온다. 이는 단순한 우울감이나 권태와 다르다. 실존적 공허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통째로 잃은 상태를 가리킨다.


프랭클은 현대인이 이미 이런 상태에 빠졌다고 보았다. 전통과 본능이 더는 삶의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자,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남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그렇게 판단을 외부에 맡기며 공허를 피한다. 결국 실존적 공허는 개인의 심리 상태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시대의 증상으로 번진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프랭클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넘어설 때 의미를 발견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과업을 수행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태도를 선택한다. 프랭클은 이 움직임을 ‘자기초월’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기초월을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미는 막연한 기분이나 자기만족을 벗어난다. 의미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과 사람에게 책임 있게 응답할 때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행복도 같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행복을 직접 목표로 삼으면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집착한다. 반대로 과업과 타인에게 몰입하면 행복은 그 결과로 따라온다. 자기실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아를 완성하려고 자신에게 매달릴 때가 아니라, 자신을 넘어설 때 비로소 자아를 실현한다.


따라서 프랭클은 인간을 자기 안에 갇힌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넘어 과업과 타인을 향할 때 비로소 자신을 완성한다고 보았다.

 

 

 

# 인간은 의미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의미를 향한 의지가 방향을 제시한다면, 자유와 책임은 그 방향을 현실의 선택으로 바꾼다.


인간은 유전과 환경,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 조건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프랭클이 수용소 경험에서 길어 올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바로 이 최소한의 실존적 여지를 가리킨다.


이 주장은 무조건적인 낙관과 다르다. 프랭클도 환경이 인간을 빚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인간을 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물로만 보는 시선을 경계했다. 인간은 조건의 영향을 받지만, 그 조건에 대응하는 방식을 통해 다시 자신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자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는 힘에 가깝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는 책임과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책임을 떼어 낸 자유는 쉽게 방종으로 흐른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낳은 결과에도 답해야 한다.


여기서 책임은 죄책감이나 자기비난을 뜻하지 않는다. 프랭클이 말한 책임은 삶이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응답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의미는 머릿속에서 깨닫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택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현실에 나타난다.


운명론과 집단주의, 광신주의는 이 자유와 책임을 피하는 세 가지 방식이다.


운명론은 인간을 유전과 환경이 만든 산물로 규정하고, 스스로 선택할 가능성을 지운다. 집단주의는 개인이 해야 할 판단을 다수에게 맡긴다. 광신주의는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단의 신념에 자신을 묶는다.


세 태도는 겉으로 서로 달라 보인다. 그러나 모두 스스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일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결국 의미를 향한 열망은 자유를 거쳐 선택으로 이어지고, 책임을 거쳐 행동으로 바뀐다. 깨달음은 출발점일 뿐이다. 인간은 삶의 질문에 행동으로 답하면서 자신을 만들어 간다.

 

 

 

# 의미는 언제 가능하며 어디까지 유효한가


 

프랭클은 삶의 유한성을 의미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의미가 생긴다고 보았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인간은 선택을 끝없이 미룰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기회도 무게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삶은 유한하고,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그 되돌릴 수 없음이 지금의 선택에 무게를 더한다.


따라서 죽음도 삶을 헛되게 만드는 종착점에 머물지 않는다. 죽음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시간관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도 바꾼다. 인간이 이미 실현한 의미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했던 경험과 완수한 과업, 견뎌 낸 고통은 과거 속에 남는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완성된 사실이 된다.


인간은 미래에서 가능성을 선택하고, 현재에서 그것을 실현하며, 과거에 그 결과를 남긴다. 따라서 삶은 모든 것을 잃어 가는 과정이 아니다. 삶은 가능성을 하나씩 현실로 바꾸어 과거에 보존하는 과정이다.


프랭클은 고통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았다. 다만 그는 고통 자체를 미화하지 않았다. 피할 수 있는 고통이라면 마땅히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마지막까지 의미의 가능성을 지킨다. 인간은 고통과 죄책감,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다운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 프랭클은 이 힘을 ‘비극적 낙관주의’라고 불렀다.


이 사상은 번아웃과 실업, 고립, 성취 강박 같은 현대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인간은 자원이 부족할 때만 고통받지 않는다.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 어디에 기여하는지 알지 못할 때 더 깊이 흔들린다.


의미를 중심에 둔 접근은 인간의 가치를 직업적 성취에만 가두지 않는다. 인간은 일을 완수하면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찾을 수도 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접근에도 분명한 경계가 필요하다. 실업을 개인의 의미 상실로만 해석하면 노동시장과 복지 제도가 져야 할 책임을 가리게 된다. 번아웃을 개인의 태도 문제로 돌리면 과로와 잘못된 조직문화를 숨기게 된다.


더구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의미를 찾으라고 요구하는 순간, 프랭클의 사상은 위로가 아니라 의무로 변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을 일상의 고난과 같은 차원에서 다룬다면 그 사건이 지닌 역사적 특수성도 지워 버릴 수 있다.


따라서 프랭클의 이론은 고통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는 사회이론이라기보다, 주어진 조건에 인간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묻는 실존적 윤리학에 가깝다. 구조적 원인은 제도와 정책이 다뤄야 한다. 개인은 그 조건 속에서 삶의 방향을 회복해야 한다.


두 영역을 구분해야 프랭클의 통찰도 개인 책임론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렇게 읽을 때 그의 사상은 고통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논리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상으로 남는다.

 

 

 

# 글을 마치며,


 

프랭클의 진단은 여기서 오늘의 현실과 만난다.


스스로 삶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판단의 부담을 덜어 줄 대상을 찾는다. 그러면 집단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프랭클이 1955년 강연에서 지적한 집단주의와 광신주의가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킨다. 삶의 의미가 사라진 자리를 집단 정체성이 채우고, 그 정체성은 다시 타인을 향한 적대로 이어진다.


오늘의 청년 세대는 이 경로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2025년 5월 청년층 고용률은 46.2%로 1년 전보다 0.7%포인트 떨어졌다. 졸업 후 첫 직장을 얻기까지는 평균 11.3개월이 걸렸다. 미취업 졸업자 가운데 25.1%는 구직 활동이나 교육에 참여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청년이 사회에 진입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계속 늘어난다. 그러나 사회는 그 공백을 견딜 수 있도록 역할과 전망을 제공하지 못한다.


역할을 잃은 상태는 정치적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2025년 조사에서는 20대의 37%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성별에 따라 정치적 선택이 크게 갈렸다.


기존 정치는 청년이 체감하는 불안과 박탈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자신이 겪는 문제를 설명해 줄 집단 정체성을 찾아 결집하기 시작했다. 세대 전체가 하나의 이념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환경에서 정체성 정치가 그 빈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이 결집은 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정보를 주고받는 공간을 넘어, 비슷한 감정을 모으고 강화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제20대 대통령선거 유권자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커뮤니티를 자주 이용할수록 상대 정당을 향한 적대감이 커졌다. 특히 경제적 만족도가 낮은 집단에서 이러한 관계가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개인이 느끼는 고립과 불안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거치면서 집단의 피해 서사로 다시 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복잡한 구조적 문제는 특정 성별이나 세대, 정치 집단의 책임으로 단순해진다.


이 현상을 우경화나 진보화 같은 단선적인 이념 틀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핵심은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특정 집단이 제시한 인과관계와 적대 서사가 청년의 판단을 대신한다는 데 있다.


그 서사 안에서 취업난은 노동시장의 모순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 특혜를 받은 결과로 해석된다. 주거 불안도 자산 시장의 결함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청년 세대의 몫을 빼앗은 결과로 바뀐다.


이런 해석은 현실을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개인에게 소속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현실을 바꾸는 데 필요한 이성적 판단과 책임 의식을 약화한다.


따라서 최근의 정치적 분화는 삶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이 사라진 자리를 집단 정체성이 채워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 책임을 청년 개인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사회는 고용과 주거의 불안정을 방치했고, 청년이 오랫동안 대기 상태에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런 구조를 외면한 채 개인에게만 합리적으로 판단하라고 요구한다면, 사회의 실패를 개인의 결함으로 바꾸어 떠넘기는 셈이다.


필요한 처방은 분명하다. 먼저 청년이 자신을 사회에 필요한 존재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회는 지금의 대기 시간이 소모적인 낭비가 아니라, 다음 선택을 준비하고 역량을 쌓는 시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 타인을 적대하지 않고도 자신의 불안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새로운 언어와 통로도 마련해야 한다. 한 세대가 삶의 의미를 잃으면 정치적 서사는 그 빈자리로 밀려든다.


따라서 정치적 지향의 선악을 따지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무엇이 청년에게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역할과 전망을 빼앗았는가. 그리고 사회는 그들이 다시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있도록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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