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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열며,


 

1982년, 뉴욕현대미술관은 일흔 살의 루이즈 부르주아에게 여성 조각가로는 처음으로 회고전을 열었다.

 

회고전은 보통 경력의 결산으로 여겨지지만, 부르주아에게는 국제적 평가와 후기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1999년, 여든일곱의 부르주아는 《마망》을 공개했다. 어머니의 직조 작업에 대한 기억을 반세기 만에 거대한 강철 거미로 재현한 이 작품은,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이 되었다.

 

전성기가 생물학적 나이에 비례한다는 편견, 회고전을 은퇴로 여기는 시각이 틀렸음을 부르주아는 자신의 경력 전체로 증명한 셈이다.

 

음악에서 피날레는 곡의 단순한 마지막 부분이 아니라, 앞선 악장 전체의 의미를 재구성하며 완성하는 마지막 악장을 뜻한다. 부르주아의 후기 작업이 그의 초기와 중기 작품을 다시 읽게 만들었듯, 예술가의 노년은 이전의 삶 전체를 재해석하는 힘을 가진다.

 

이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유명한 수전 구바의 『피날레』다. 구바는 수련기-성장기-전성기-쇠퇴기라는 고정된 주기로 서술되어 온 예술가의 삶을 비판하며, 조지 엘리엇, 콜레트, 조지아 오키프를 '연인들'로, 이자크 디네센, 메리엔 무어, 루이즈 부르주아를 '이단아들'로, 메리 루 윌리엄스, 궨덜린 브룩스, 캐서린 더넘을 '현자들'로 나누어 아홉 명 여성 예술가의 노년을 다룬다.

 

이 기획에는 저자 자신의 사정이 배어 있다. 2008년 예순셋에 난소암을 진단받은 구바는 먼저 늙어간 여성 예술가들의 노년에서 자신의 모델을 찾으려 했다. 이 책은 노년이 창작의 종료 시점이라는 사회적 판정과 그 근거가 얼마나 부당한지를 분석하기에 더욱 뜻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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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적 억압에서 시간적 제약으로


 

이 질문의 뿌리는 사십칠 년 전의 책 한 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19세기 영미 여성 작가들을 분석했다. 여성은 순종적인 천사 아니면 위험한 괴물이라는 이분법적 이미지 속에 갇혀 있었고, 여성 작가는 작품을 쓰기 전에 자신이 작가일 자격부터 증명해야 했다.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겉으로는 관습을 따르는 척하면서 그 이면에 분노와 탈출의 욕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이다. 다락방에 갇힌 버사는 제인의 억압된 분노를 대신 표출하는 분신으로 읽힐 수 있다. 다락방은 통제하기 어려운 여성성을 격리하는 수단이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억압받는 여성이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를 물었다면, 『피날레』는 이미 예술가로 자리 잡은 여성이 노년에도 창작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러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도 변했다. 전작에서 여성을 가둔 것이 집과 다락방이라는 물리적 공간이었다면, 『피날레』가 주목하는 억압 장치는 전성기와 은퇴라는 시간적 제약이다. 활동 장소를 제한하던 사회가 이제는 활동 가능 기간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적 제약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려면 젊은 여성과 늙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낙인을 비교해야 한다. 젊은 여성의 성적 욕망은 방탕함이라 비난받았고, 늙은 여성의 성적 욕망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젊은 여성의 분노는 히스테리였고, 늙은 여성의 분노는 노인의 괴팍함이다. 젊은 여성의 창작 야심은 여성답지 않은 경쟁심이었고, 늙은 여성의 창작 야심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이기심이다. 단어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같다.


구바는 노년 여성이 소외되는 이러한 환경을 'Little-Old-Lady-Land'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늙은 여성은 사소하고 무해하며, 정치적·성적·창조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미친 여자'와 '늙은 여자'는 통제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시대가 만들어낸 두 가지 낙인이었던 셈이다.


 


# 관계를 맺고, 시선에 저항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자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피날레』에서 구바는 아홉 명의 여성 노년 예술가를 연인, 이단자, 현자라는 세 범주로 묶었다. 구바에 따르면 연인들은 젊은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이들이고, 이단자들은 기이하고 독특한 개성을 앞세워 노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복한 이들이며, 현자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을 통해 노년에 활력을 얻은 이들이다.

 

이 분류를 노년 여성에게 덧씌워진 규범에 비추어 보면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연인이 규범을 거부한 지점은 성적 욕망이고, 이단자가 거부한 지점은 행동의 정상성이고, 현자가 거부한 지점은 공적 권위다.


연인들부터 보자. 1880년, 예순 살의 조지 엘리엇은 스무 살가량 어린 존 월터 크로스와 결혼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전의 역사다. 엘리엇이 조지 헨리 루이스와 오랫동안 동거했을 때 비난했던 엘리엇의 오빠는, 크로스와의 법적 결혼에는 축하를 보냈다. 사회가 여성의 사랑을 승인하는 기준은 관계의 본질이 아니라 법적 형식이었다. 콜레트는 일흔한 살 무렵인 1944년 『지지』를 발표했다. 노년의 작가가 여성의 성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삼은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와 후안 해밀턴의 관계 역시 연애나 고용이라는 기존 단어로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것이었고, 세상은 추문이나 의존이라는 편견으로 먼저 판단하려 했다. 이들은 노년에도 관계와 욕망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


이단자들의 경우, 저항은 겉모습에서부터 드러난다. 이자크 디네센은 검은 옷, 깡마른 신체, 귀족적인 말투를 자신의 이미지로 구축하며 사람들이 기대하는 '평범한 할머니'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메리엔 무어는 삼각모와 망토를 입고 야구장에 나타났고, 자신의 초기 작품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독자나 비평가의 기억보다 작가 자신의 현재 판단을 우위에 두었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가족 간의 갈등과 공격적인 감정을 작품에 여과 없이 드러냈고, 말년까지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신랄하게 비평했다. 노년 여성에게 요구되는 무해하고 눈에 띄지 않는 태도를 외모와 발언, 작품 수정을 통해 거부한 것이다.


현자들에게 지혜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교육과 행동이었다. 메리 루 윌리엄스는 텔로니어스 멍크 등 젊은 재즈 음악가들의 멘토였고, 사적인 거실을 음악가들의 교류 공간으로 개방했다. 궨덜린 브룩스는 흑인 작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뒤, 1960년대 후반 흑인 소유 출판사로 이동해 젊은 흑인 시인들을 발굴하는 일에 헌신했다. 캐서린 더넘은 지역사회에 교육기관을 세웠고, 팔십 대에 아이티의 정치 상황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 후기 작품이 생애 전체의 의미를 바꾼다


 

이 책의 가치는 "늙어도 일할 수 있다"고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늙었기 때문에 도달할 수 있는 예술과 삶의 방식이 존재함을 밝혀낸 데 있다.


삶의 어떤 사건은 그 순간에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 삶과 작품 전체를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 재해석을 이끈 것은 평론가가 아니라 예술가 자신들이었다. 그들은 화집을 기획하고 작품을 수정했으며, 강연과 자전적 글을 통해 자신의 삶과 작품을 해석했다. 구바 역시 이 책을 통해 노년의 관계, 신체 변화, 후기 작품을 서술의 중심에 둠으로써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다시 편집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아홉 명의 삶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눈 것은 이해를 돕지만 인물의 실제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부르주아는 이단자이면서 현자이기도 했는데, 한 인간의 삶을 하나의 유형으로 억지로 꿰맞출 수는 없다.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작가와 무용가가 처한 조건과 계급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미 명성을 얻은 예술가들이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여성 예술가의 노년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노인도 노력하면 계속 성취할 수 있다'는 성공담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후기 창작을 가능하게 한 조건을 살펴보면, 창작이 개인의 각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작업 공간과 의료비를 감당할 경제적 조건, 미술관이나 출판사의 지원, 조수와 편집자와 가족과 공동체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결국, 노년의 창작 가능성은 사회가 어떻게 지원하고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 글을 마치며,


 

이제 시선을 한국의 현실로 돌려보자.

 

2025년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 인구의 20.3%에 이르렀다. 노년은 더 이상 일부 세대의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예술정책은 길어진 노년을 창작 생애의 일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2026년 정부가 신설한 ‘K-아트 청년창작자 지원사업’은 20세부터 39세까지의 예술가 3천 명에게 연간 900만 원을 지원한다. 청년 예술가는 ‘창작자’로 호명되고, 그에게는 안정적인 환경과 앞으로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설명된다.

 

반면 같은 해 예술활동준비금 제도는 70세 이상 신청자를 자동으로 ‘원로예술인’으로 분류하고 가점을 부여한다. 두 사업은 목적이 달라 지원액을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정책이 연령대에 붙이는 이름의 차이는 선명하다. 청년에게는 창작과 성장이라는 미래형 언어가 주어지고, 노년에게는 경륜과 예우라는 과거형 언어가 주어진다.

 

‘원로’라는 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노년 예술가를 부르는 거의 유일한 정책적 명칭이 될 때다. 원로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동시에 주요 작업을 이미 끝낸 사람처럼 들린다. 예술가는 여전히 작품을 만드는 현역인데도 나이가 드는 순간, 창작자보다 업적을 기념하고 경험을 전수하는 존재로 먼저 규정된다.

 

이러한 시선은 노년 여성에게 더 가혹하다. 노인 여성의 소득빈곤율은 45.3%로 남성의 34.0%보다 높다. 생계와 의료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작업실과 재료비를 마련하고 작품 발표를 이어가라는 요구는 창작을 개인의 정신력에 떠넘기는 일이다.

 

노년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업적을 기리는 예우만이 아니다. 후기 작품을 위한 다년간의 제작비와 작업 공간, 전시·공연·출판 기회, 질병과 돌봄을 고려한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정책도 노년을 별도의 창작 단계로 인정하고, ‘원로예술인’과 함께 ‘후기 창작자’라는 현재형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예술가가 언제 전성기를 맞고 언제 마지막 작품을 만들지는 행정이 정할 일이 아니다.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피날레를 대신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끝까지 쓸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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