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인장은 가시로 찌르지 않는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조용하다. 방어적이지만 공격적이지 않다. 나는 그런 종류의 강함을 오래 좋아해왔다. 『피날레』를 읽으면서 자꾸 그 생각이 났다. 여기 아홉 명의 여자들도 그렇다. 시끄럽게 싸우지 않는다. 그냥 끝까지 자기 모양으로 산다.
늙은 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늙은 남자는 봤다. 거장, 노장, 원로. 단어부터 다르다. 늙은 여자에게는 그런 단어가 없다. 할머니, 혹은 무시해도 좋은 존재. 수전 구바는 이 빈자리를 묻는다. 그리고 채운다.
『피날레』는 점잖은 헌사가 아니다. 구바는 예순셋에 난소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살아남았고, 기대하지 못했던 시간을 얻었다. 이 책은 그 잉여의 시간이 던진 질문의 기록이다. 죽은 것처럼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창한 질문 같지만 구바는 거창하게 답하지 않는다. 아홉 명의 구체적인 삶으로 답한다.
조지 엘리엇, 콜레트, 조지아 오키프, 이자크 디네센, 메리앤 무어, 루이즈 부르주아, 메리 루 윌리엄스, 궨덜린 브룩스, 캐서린 더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은 늙은 채로 끝나지 않았다. 늙은 채로 다시 시작했다.
콜레트는 일흔이 넘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이 나이의 문제였던 적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조지 엘리엇은 스스로를 늙은 두꺼비에 빗대며 자신의 노화를 비웃었다. 한쪽은 부정하지 않고 끌어안았고, 한쪽은 풍자로 거리를 뒀다. 방식은 다른데 결과는 같다. 늙음을 변명하지 않았다.
오키프는 노년에 양의 머리뼈를 그렸다. 죽음의 형상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그림이다. 무서워하지 않고 그렸다는 사실이, 나는 그 어떤 평론보다 많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을 붙잡은 건 루이즈 부르주아다. 일흔이 넘어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을 때, 미술계는 그를 그저 짓궂은 할머니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그 회고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형 거미 조각 ⟨마망⟩을 완성했고, 같은 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에서 비롯된 상처는 칠십대엔 분노로, 팔십대엔 치유로 형태를 바꿔갔다. 죽기 두 해 전엔 철망 케이지 안에 푸른 유리 구체들을 매단 작품을 내놓았다. 두려움 없이 고통을 마주한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형태다. 상처를 끝까지 재료로 쓴다는 것. 도망치지 않고 그걸로 뭔가를 계속 만든다는 것. 그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부르주아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자꾸 잊게 된다.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캐서린 더넘은 자택을 살롱으로 만들었다. 학생과 교사가 드나들었다. 늙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함께 불러들였다. 고립이야말로 노년의 진짜 적이라는 걸, 구바는 더넘을 통해 보여준다. 창조는 혼자 견디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문을 열어둬야 한다.
구바는 이 아홉 명에게서 공통점을 찾는다. 기개. 점잖지 않은 단어다. 그래서 정확하다. 기개는 우아함과 다르다. 기개는 버티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표정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기개가 노년에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바가 다룬 예술가 다수는 마흔, 쉰 무렵에 이미 말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정사를 정리하고, 관계를 다지고. 늙어서도 젊게 머무르라는 흔한 조언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오히려 늙음을 미리 끌어안은 사람이, 그 늙음 안에서 더 오래, 더 멀리 일했다.
요즘 서점 매대에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들의 얼굴이 부쩍 늘었다. 귀엽고 무해한 이미지. 『피날레』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부르주아는 짓궂었고, 더넘은 단호했고, 콜레트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늙는 방식까지 모두 점잖을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책의 진짜 메시지는 거기에 더 가깝다.
정희진은 추천사에서 이 책을 '동반자'라 불렀다. 동의한다. 다만 그 말이 풍기는 따뜻함만으로는 이 책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피날레』는 위로보다 직시를 택한다. 늙은 여자의 몸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사회적 합의, 늙은 여자에게는 더 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는 가정. 구바는 이 가정을 반박하는 대신, 아홉 개의 반례로 짓밟는다.
나는 아직 스물몇이고, 늙음은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노트를 끄적였다. 내가 지금 무얼 미리 짓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누군가는 마흔에, 누군가는 쉰에 자기 말년의 토대를 닦았다는 구절을 읽고 나니, 노년이 갑자기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이 언젠가의 재료가 될 거라는 생각.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592쪽이지만 술술 읽힌다.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날 때마다 다음 사람이 궁금해지는 구조라서, 책을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부르주아의 거미는 아흔 살에 완성됐다. 더넘의 살롱은 죽는 날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개의 삶은 끝나지 않는 방식으로 끝났다. 나는 그 점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