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피날레_자켓_표1(띠지).jpg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나이든 여자를 위하여,

그리고 나이들고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나이 듦에 대한 공포,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두려움은 쉽게 떨쳐내기 어렵다.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향해 천천히 나이를 먹어가는 일은 지도 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험난한 여정과 같다. 그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워 막막해질 때면, 먼저 그 시기를 거쳐 간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수전 구바의 책 『피날레』는 노년의 시기에도 오히려 창의력을 분출하며 자신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한 아홉 명의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저자가 '창조적 여성의 노년기'라는 주제에 이끌린 건 내면에서 쏟아지던 수많은 질문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물음은 '나 자신의 노년기에는 어떻게 창의력을 증진할 수 있을까?'였다. 저명한 여성들은 중년의 실패나 성취를 되돌아보기 시작하는 시기에 어떤 수단으로 경력을 확장했을까. 예술 창작이 노화 과정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노년'과 '예술'이라는 이미지를 나란히 떠올려 본 적이 드물다. 정년퇴임의 시기를 지난 60세 이후의 예술가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가?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예술가들은 어떤 길을 걷게 되는가. 이 책은 바로 그런 길, 각자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 개개인의 피날레와 같은 순간들을 포착하여 모든 좌충우돌과 오점까지도 가감 없이 기록함으로써, 이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둔 우리에게 크고 작은 실마리를 쥐여준다.

 

 

 

창조적 활동은 도피처이자 극복 방법이며, 표현 수단이다


 

'노년은 축복이자 저주'라던 작가 수전 구바는 예순셋의 나이에 말기 난소암 진단을 받고 치열한 투병 생활을 해야만 했다. 거듭된 수술과 화학치료를 받으며 육체는 쇠약해졌지만, 그는 그 지독한 시간을 통과하며 본인이 '암 생존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을 경유한 저자의 내면에는 나이 듦에 대한 질문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노화는 창조성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반대로 창조성은 노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피날레』라는 책을 통해 노년기에도 왕성히 창작 활동을 이어간 아홉 명의 예술가의 생애를 따라간다.

 

책은 총 세 개의 챕터에 걸쳐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한다. 1부 '연인들'에서는 예술가들이 삶의 동반자로 택했던 파트너와 예술작품을 유통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체적 무력함에 대처할 힘을 얻는 과정을 살핀다. 2부 '이단아들'에서는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옷차림과 작품을 통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노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3부 '현자들'에서는 평생 쌓아온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새로운 활동에 나선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이 아홉 명의 치열한 삶을 통과해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면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예술과 창작 활동은 결코 어느 시점에 스위치를 끄듯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은 생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동력이 되어준다는 사실 말이다. 마침내 삶의 피날레에 이르러 예술적 본능으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해 낼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보면 창조적 활동은

나이듦의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이자,

노년에 따라오는 결손들을 극복하는 방법이며,

헤쳐나가기에 다소 버거운 그 땅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끝'을 선명하게 감각하는 순간. '언젠가'라는 흐릿한 말이 '곧'이라는 구체적인 현실로 바뀌는 순간. 도리어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남은 인생을 모두 태워서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겠노라 선언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뜨거운 궤적을 읽으며,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아가 이 책은 단순히 미래와 늙음을 대비하는 것을 넘어 사회가 나이 든 여성에게 강요하는 시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사실 정말로 기괴한 것은,

늙은 여자들이 육체도 정신도 워낙 연약해서

무시해도 좋으며 딱히 언급할 거리도 없어서

대개 눈에 띄지 않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일반적인 가정이다.

 

 

"캐릭터가 입체적이어서 좋았어." 대중문화에서 흔히 칭찬으로 쓰이는 이 표현 중 '캐릭터'라는 자리에 노인,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노인이 서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서사 속 나이 든 여성은 대부분 할머니나 누군가의 어머니로 등장하며, 날것의 욕망과 주체적인 의지를 지닌 한 인간으로 그려지기보다는 헌신적인 모성의 틀 안에 갇혀버린다. 하지만 현실이 정말 그런가? 여성 노인은 죽는 날까지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 속에 사로잡혀야 하는가.

 

『피날레』는 여성 노인이 가진 입체적인 욕망과 인간성을 조명한다. 특히 창의성이 풍부했던 나이 많은 여성에게 초점을 맞춰, 그들이 '이후의' 나이까지 어떻게 창조성을 이어갔는지 구체적인 사례로 그려낸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일반적으로 경시당하는 노년기가 오히려 삶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가 될 잠재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부모의 통제를 받는 유아기를 지나 교육에 지배받는 청소년기를 건너면, 가족에 대한 부양과 책임이 우선순위가 되는 중년기가 찾아온다. 그러다 겨우 노년의 나이에 들어서야 창조적인 추구로 온전히 몰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 예술가들은 그제야 진정한 예술적 능력을 펼치고, 그간 쌓아온 창조적 근육을 발휘해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두렵게 느껴지던 노년기가 오히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듯하다.

 

그렇게 아홉 예술가의 생애를 훑어보고 나면, 저자의 결론 부분에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 그렇게 살아가자.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의 기쁨과 괴로움을 되돌아보고, 문화의 주변부로 밀려난 상태를 받아들이며 자연에서 위안을 구하고, 새로운 소식을 꾸준히 따라가고, 용서와 축복을 반복하며 친밀한 관계를 돈독히 가꿔가는 일."

 

장밋빛 미래만 펼쳐지는 삶이 과연 존재할까. 나는 그런 무결한 미래를 믿지 않는다. 차라리 크고 작은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길이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에 훨씬 가깝다. 그 팍팍한 길을 걷다가 가끔 들려오는 반가운 소식에 웃음 짓고, 그 작은 힘으로 다시 하루를 버텨내는 것. 그런 게 진짜 우리의 삶이라고 믿는다. 물론 다가올 미래는 여전히 두렵다. 불행은 피하고 좋은 일만 누리고 싶은 게 사람의 솔직한 마음이니까. 그럼에도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지레 겁내지 말자는 것. 그것이 수전 구바가 이 책을 통해 건네고 싶었던 위로가 아닐까.

 

저자는 책에 등장한 예술가들이 층층이 쌓아 올린 세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관점을 대담하게 표출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질 시간 역시 기꺼이 나의 경험과 창조적 근육으로 삼을 것. 각자의 삶 속에서 멈추지 않는 탐험가이자 철학자가 되어보는 것. 이 책은 불투명한 미래를 앞두고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기꺼이 자신만의 자유롭고 눈부신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등을 밀어준다. 더는 두렵지 않을 미래를 향해서 말이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