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로테/운수>는 두 권의 소설 속에서 주변 인물로 등장하던 여성 인물들을 무대의 중심으로 불러온다. 한 명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짝사랑 상대로 나오는 로테이고, 다른 한 명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의 병들어 죽는 아내이다. 전혀 다른 나라, 시대상을 배경으로 창조된 두 여성을 한 편의 연극으로 엮어주는 연결고리는 그들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성 인물들에게 당한 폭력이다. <로테/운수>는 로테를 ‘미술사학과 부교수로서 좋은 커리어를 쌓고 있었으나 제자의 스토킹과 일련의 사건으로 정신과 상담실을 찾은 김로테’로, 김 첨지의 처를 ‘여러 해 동안 가정폭력을 당하다 남편을 죽여 법정에 선 운수’로 변모시켰다. 연극은 두 여성 인물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관객들이 로테와 운수가 겪은 사건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축적했을지를 직접 보고 느끼게 만든다.
이 연극을 보게 된 이유는 운수의 목소리가 궁금해서였다. 옛 시대가 배경인 문학 작품을 읽을 때면 시대상을 감안하며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그와 함께 오늘날에는 더 용인되지 않는 행동이나 요즘은 추구하지 않는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읽는 법도 배운다. 그래서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나서 김 첨지가 아무리 삶이 팍팍하다 해도 아픈 아내를 때리는 장면에 대해, 그 당시 내가 읽었던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김 첨지의 행위를 비판하는 구절이 없다는 것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다른 출판사 교재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요소는 당연한 얘기여서 굳이 문장으로 적히지 않는 걸까, 아니면 굳이 고려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때의 당혹감이 기억에 더 오래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운수가 직접 말을 한다고 하니 그녀의 기분과 생각이 어땠을지 들어보고 싶었다.
<로테/운수>가 올려진 극장 공간아울은 대학로 특유의 맛이 있는 소극장이었다.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서 배우의 눈빛이 세세하게 잘 보일 것 같다는 기대를 하며 암전을 기다렸다. 스토킹과 가정폭력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극인 만큼 공연 시작에 앞서 주의 사항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왔다. 혹여 연극을 보다가 트라우마 반응이 오는 관객이 있다면 손을 들어 어셔에게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안내 방송의 음성이 진지하고 착잡했기에 다소 긴장이 되었다. ‘생각보다 보기 힘든 장면이 나올 수도 있겠어. 생각보다 어려운 관극이 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 명의 배우가 끌고 가는 이 연극은 로테와 운수라는 캐릭터가 동시에 나오는 형식은 아니었다. 연극은 각 인물의 에피소드로 진행되었다. 배우 한 명이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극을 진행하면 다른 배우 한 명이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그외 인물들의 대사는 음성 녹음이나 벽에 틀어지는 활자로 대체되었다. 공연의 전반부는 로테의 이야기였다. 로테는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내원한 계기를 설명한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있고, 외적 조건이 좋은 남자친구가 있는 김로테는 자기 삶에 만족하는 상태였다. 집 앞에 푸른 리본이 묶인 장미꽃이 남자친구가 보낸 것이 아님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간 집 내부 물건이 미묘하게 옮겨져 있어 느끼던 위화감이 기분 탓이 아니라 누군가의 침입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로테는 홈캠을 설치해 스토킹 범을 잡는다. 스토커의 정체는 로테의 수업에 들어오던 제자 베르테르이다.
스토커가 있는 것 같다는 말에 남자친구는 ‘지금 인기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라고 말하거나 엄마는 ‘여자 혼자 사니까 그래. 얼른 본가 들어와.’ 같은 말을 한다. 로테가 감정적 지지를 바라는 가까운 사람들은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에 심히 무지하거나 원인을 여자 혼자 거주하는 것의 취약성에 둔다. 그런 발상에서 기인한 ‘전형적으로 무지한’ 대사들이 연달아 들리니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진은 길지 않은 상연 시간 속에서 로테가 겪었을 답답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줘야 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말들이 쉼 없이 이어지는 것이 여전히 현실일 것이다.
범인을 확인하고 난 후 로테가 겪는 일들은 현실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로테의 불안과 억울함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로테의 직장인 대학에서는 스토킹범이 학생이다 보니 로테의 공론화를 껄끄러워 한다. 스토커 베르테르의 엄마가 고소를 취하해 달라며 로테의 집 앞까지 찾아온다.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긴 편지를 보내더니 자살한다.

이번 관람 기회에 원작 <베르테르의 슬픔> 내용을 살펴 보며 놀랐던 것은 베르테르가 취한 죽음의 형태였다. 자살 현장의 많은 요소가 로테를 가리켰다. 베르테르가 필요로한 알베르트의 권총은 로테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다. 베르테르는 그 사실을 알고도 권총 자살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유서에 ‘당신이 건넨 총으로 죽음을 맞는다’고 명시해 두었다. 그가 죽을 때 입은 옷은 로테와의 첫만남에서 입었던 푸른 연미복이었다.(연극에서 붉은 장미를 묶은 푸른 리본이 여기서 온 것일 테다) 또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자신의 자살 소식이 들리지 않도록 멀리 떠나서 죽는 것도 아니고 로테가 사는 마을에서 죽는다. 이 정도면 로테를 원망해서 고발하는 죽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게 사랑이 맞을까? 시작이 사랑이었어도 어느 순간 그의 감정은 사랑이라 부르기 힘든 것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였다. 그는 로테의 곁을 떠나 멀리서 행복을 빌기보다 죽음으로써 그녀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로테의 이름에 자기 이름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스토커가 자기 행동의 죗값을 치르지 않은 채 죽은 <로테/운수>에서도 범죄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겪은 ‘소란스러워진 일상’에 가타부타 얹는 말들은 살아 있는 김로테에게로 전가되었을 것이다.
로테 에피소드 초반부터 검은 옷을 입은 다른 배우가 등장한다. 로테가 스토커로부터 위협을 느끼거나, 주변인의 무신경한 발언을 듣거나,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긴 롤러로 바닥에 검은 페인트를 한 줄씩 칠한다. 초반에는 이것이 로테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형상화한 장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스토킹 가해자의 자살 후에도 자기 일상을 지키려고 한 로테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지를 때 이 연출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이란 극중 소설집의 발간이다. ‘여교수를 향한 제자의 정열적인 사랑… ! 실화 기반 소설 출간…!’ 홍보를 위해 이런 2차 가해 문구를 아무렇지 않게 쓴다. 자신의 범죄 피해 경험이 치명적인 로맨스의 탈을 쓰고 남의 입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공포가 로테를 집어삼킨다. 일상을 지켜내려는 몸부림이 순식간에 무력해진다. 의자에 올라가 웅크리며 비명을 지르는 로테 코앞까지 간 다른 인물이 로테 주위를 거칠게 검은색으로 칠한다. 지금까지 채워진 이 검은색 낭떠러지는 피해자인 로테가 몰이해와 범인 일가의 뻔뻔함, 사회의 2차 가해 앞에서 설 곳을 잃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한편 소설의 발간은 로테의 모델이자 괴테가 사랑했던 샤를로테 부프와 김로테가 중첩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름과 남편 직업 등의 설정이 실제와 너무 비슷하다 보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화제가 될수록 샤를로테 부프도 난처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을까. 워낙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김로테의 상담 시간이 끝나고 의사와 로테는 다음 내원 일자를 잡는다. 로테가 진료실에서 나가고 벽에는 의사가 적는 진단명이 뜬다. 그는 로테의 이야기를 피해망상 정도로 치부한다.

또 한 번의 암전 뒤로 불이 켜지면 이제는 운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형복을 입은 두 여자가 있다. 의자에 앉은 한 명은 운수 본인이다. 증오에 찬 눈빛으로 바닥에 앉아 있는 한 명은 아직 정체 불명이다. 운수는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설렁탕 뚝배기로 수 차례 내리쳐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서 있다. 운수의 변호사는 수 년 간의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한 정당방위라며 운수의 무죄를 주장한다. 운수는 숱한 폭발로 인해 귀와 정신이 멍해진 사람처럼 타인의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말소리는 늦게 입력되고 느리게 이해된다. 눈만 깜빡일일 뿐 입은 굳어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변호를 하기에 너무 불리한 상태다.
재판장에서 질문이 오가며 운수가 천천히 이지를 찾긴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자신을 명민하게 변호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운수 옆의, 운수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인물은 분노에 차서 운수에게 말을 하라고 다그친다. ‘말을 해, 말을 해 이년아! 이 우라질 년!’ 그렇다. <운수 좋은 날>에서 보던 김 첨지의 대사다.
멍한 상태의 운수에게 여러 질문이 쏟아진다. 재판부는 우선 운수가 몇 년 동안 폭력을 당하면서도 남편을 떠나지 않은 이유를 규명하려 한다. 운수가 묘사하는 결혼 생활은 불행하고 불합리하다. 신혼 초부터 시작된 폭력. 폭력 후의 사과를 믿었던 것.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남편의 바뀌겠다는 말을 쉽게 믿었던 것. 자신이 번 돈은 생활비로 쓰여 저축한 것이 없고 남편의 경제 상황은 운수가 알 수 없었던 것. 몇 번의 신고에도 남편과 분리되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신고를 포기했던 것. 계속되는 폭력 속에서 무기력해지고 행동거지가 느려지는 운수다. 말을 빨리 못하면 남편은 운수에게 또 윽박지르거나 운수를 때렸는데, 그럴수록 운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남편은 운수더러 말을 하라며 화를 내지만 정작 운수가 병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그 말은 쉽게 묵살한다.
한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 그가 가하는 폭력까지 (온갖 혼란 속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감내하다 공포에 길들여지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처참했다. 이탈리아의 첫 여성 참정권 행사를 다룬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에서도 주인공이 심각한 가정폭력을 당하고 산다. 행복한 연애와 결혼식을 지나 점점 남편이 아내의 옷차림과 화장을 단속하고 손을 올리기 시작한다. 폭력이 가장 길게 묘사되는 씬-직접적인 구타가 아니라 춤으로 표현된다-에 깔리는 배경음악도 영락 없는 사랑 노래다. 주인공의 목에는 남편의 손자국이 둘러진다. 달콤한 가사와 비참한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좋았던 사랑이 왜 누군가에게는 무기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멍에가 되는지 씁쓸해진다.
운수가 당하는 폭력의 수위도 점점 높아진다. 죽겠다 싶은 위협이 쌓이던 어느날 운수는 자기도 모르게 자고 있던 남편의 머리를 몇 번이고 뚝배기 그릇으로 내리친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뚝배기 그릇을 든 손에 실린다. 운수의 절규에는 분노와 함께 처참한 공포가 담겨 있다. 필자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몸을 꼼짝 못한 채로 굳어 있었는데 공포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슬퍼서 나려는 눈물이 아니었다. 생리적인 공포 반응이었다.
패닉에 빠져 남편의 피 위에서 허우적대는 운수를 끌어안은 정체불명의 여자의 표정에는 아까 같은 분노가 없고 슬픔과 연민이 있다. 또 이 인물은 운수가 말을 잘하지 못할 때 붓을 들고 벽에 검은 물감으로 무죄, 무죄, 무죄를 외치듯 적는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인물은 운수의 마음속 하나의 자아가 맞다. 운수의 일부임에도 그는 남편이 쓰던 어휘로 운수를 다그친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는 말만 해야했던 운수는 응축된 분노를 풀어줄 새도, 그 감정에게 줄 언어도 없었다. 맞고 사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사랑의 가치를 배반하고 이용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 대한 분노는 각자의 뒤통수에 붙은 얼굴처럼, 사실상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 분노는 가해자의 어휘를 유일한 옷처럼 주워 입거나, 그 어휘를 강제로 입은 상태였다. 이 부분이 너무 씁쓸했다. 오랜 학대 아래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언어를 잃고 가해자의 언어로 자괴감에 찬 분노를 스스로에게 쏟아붓는 모습이. 피해자가 무력한 자신에 대해 키워 온 분노를 가해자에 대한 응분과 공포에서 분리해가며 자기가 겪은 일을 객관화하고 언어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법의 판단은 다른 호흡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대응할 힘을 갖추기 위해 회복과 치유부터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그런데 사실 법원을 찾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 그 사안이 중간 시점의 개입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면 더욱 안타깝다. 운수와 변호인의 정당방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운수는 4년형을 선고 받는다.

2부 운수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 1부 로테 에피소드는 2부의 무겁고 참담한 정서를 고려해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일상이 망가지고 회복되는 듯 보였다가 갑자기 날아든 2차 가해에 로테처럼 심장이 떨어지는 효과도 있었다. 2부에서는 배우들의 연기력에 압도 당했다. 2부의 조명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직전 장면과 다른 조도의 조명을 다른 각도로 비췄을 때 인물의 눈빛은 물론이고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극장을 나와 한정된 자세로 있던 몸을 풀었다. 어기적 어기적 걸으며 연기력과 연출력이 좋은 사람들이 어쩜 이렇게 많은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연극에서 시대적, 지리적 괴리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 새삼 마음이 착잡해졌다. 김로테가 당한 스토킹 피해는 다른 나라의 여성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한 나라, 한 지역만 콕 집어 피해자가 발생하는 범죄가 아니다. 김 첨지의 처가 당하던 폭력을 현대의 운수에게 옮겨놓아도 ‘요즘 누가 저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이 여전히 어떤 여성들의 일상을 부수고 뒤흔든다. 피해를 입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고통을 축소하거나 감정적인 헛소리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연극은 의사가 쓴 로테의 진단명이나 운수의 재판 판결문에서 이를 보여준다. 성별에 따른 잣대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감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극의 메시지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데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쓰기가 어렵다. 쓰기 무서운 마음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그럴까? 아니었으면 한다. 역사에는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가 있다지만, 힘들게 얻은 권리들이 뒷걸음질에 녹아내려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연극을 감상하고 난 후 이 후기를 쓰며 생각난 콘텐츠 몇 개를 추천하며 글을 끝맺으려 한다. 이 연극에 관심이 가는 분이라면 이 콘텐츠들도 흥미롭게 감상하실 것 같다.
영화
파올라 코르텔레시,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드라마
넷플릭스 코리아 오리지널 <당신이 죽였다>
<미세스 아메리카>
<제시카 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