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건, 정말 그 사람 자체를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과 그 안에 남겨진 내 기억을 사랑했던 걸까. 그 기억 속에 진짜 '그'가 있기는 했을까.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만지며, 어떤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지나왔는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안다고 믿어버린다.

 

왜냐하면 함께했으니까, 오래 보아왔으니까,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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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 양》은 가까운 미래, 한 가족의 일상에 스며들어 살아가던 테크노 사피엔스 ‘양’이 갑작스럽게 작동을 멈추며 시작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은 온라인 댄스 대회에 참가한다. 제이크와 카이라, 딸 미카, 그리고 양. 네 사람은 어색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동작을 맞추며 한 가족의 형태로 화면에 담긴다.

 

그러나 그 찰나의 활기가 끝나고, 양은 작동을 멈춘다.


양은 중국에서 입양한 딸 미카에게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들인 존재였다. 아이가 자신의 뿌리와 연결될 수 있도록 교육해주는 문화형 안드로이드. 양은 미카에게 중국의 역사와 전통을 차분히 들려준다. 중국에 대한 정보, 그 안의 이야기를 건네는 긴 시간 동안, 양은 아이와 서로 눈을 맞추고, 표정을 읽고, 목소리를 들으며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양이 일상에서 사라졌을 때, 미카에게는 큰 공허가 찾아온다. 그저 편리를 위해 존재했던 가전제품 하나의 고장이라기보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영혼을 나누던 오빠를 잃은 실존적인 상실감이었다. 아이는 양의 형태나 쓸모를 보지 않고 그의 존재 자체를 자신의 기억에 채웠고, 진심을 교류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완전한 의미의 ‘연결’을 보여준 이들은 역설적으로 인간 아이와 안드로이드였다.


반면 엄마 카이라는 가족이 양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바쁜 자신들을 대신해 미카를 돌보던 존재. 이제는 그 없이도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슬픔보다 현실적인 정리가 먼저 닿는다. 카이라에게 양은 가족의 일원이기보다 편의와 필요로 조달된 효율적인 도구에 가까웠다.


제이크 역시 양을 고치려 사방으로 분주히 움직이지만, 그의 목적은 양의 회복이라기보다 미카가 원했고, 돈이 부족해서 새로운 기계를 사는 것도, 그럴 여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이 다시 켜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전처럼 매끄럽게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양의 깊은 내면에 숨겨져 있던 메모리칩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


수리점을 전전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양의 메모리 저장 장치는 처음에 일종의 감시 장치처럼 느껴져 찝찝한 거부감으로 먼저 다가온다. 인간 가족의 사생활을 은밀히 기록한 위험한 데이터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그러나 제이크가 그 데이터의 우주를 재생하는 순간, 그는 디지털 메모리가 아니라 양이 살아낸 '생(生)'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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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아주 짧고 사소한 순간들이 파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 창가의 일렁이는 빛, 흔들리는 풀잎, 스치는 바람, 미카의 환한 표정, 가족들의 다정한 모습, 그리고 거울 속 양, 자신까지. 양은 매일의 삶에서 오직 몇 초만을 선택해 저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어렴풋이 스쳐 보내며,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소한 장면들. 그러나 그 찰나들이 촘촘하게 모여 한 존재의 찬란한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라는 이유로, 그리고 누군가 쓰다 버린 '리퍼 제품'이라는 이유로 가치가 절하되었던 기계는 사실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그만의 생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 겹겹이 쌓인 여러 겹의 삶은 그가 분명히 살았다는 사실과 누군가의 생에서도 그가 깊이 기억되고 있다는 흔적이었다.

 

이전 가족과 보낸 기억, 홀로 응시하던 풍경, 에이다라는 존재와 나눈 교감. 양은 프로그래밍이 된 기능 그 너머에서 계속 보고 있었고, 듣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었고, 살아 있었다. 그 모든 삶이 전부 양의 것이었다. 그 기억을 마주한 순간부터, 양은 기계의 쓸모를 따지는 인간의 시야 너머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

 

"그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느냐"고 제이크는 질문한다.

 

그러니까, 여자를 보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냐고.

 

그 질문을 전해 들은 에이다는 진짜 인간다운 질문이라며 쓸쓸한 헛웃음을 흘린다.


인간은 정의하기를 좋아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다지고,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하며, 죽음이나 상실 같은 견디기 힘든 두려움마저 철저히 대비하려 한다. 사랑 또한 그렇게 쉽게 정의된다. 서로를 결속 짓고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각인시키며 나의 안정과 너의 안정을 맞교환하는 것.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이 프로그래밍은 견고한 만큼 취약하다. 통제와 안정을 추구하느라 정작 상대의 미세한 표정과 의도된 침묵을 쉽게 놓친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손을 잡고 있으니 당연히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오만한 믿음 속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잃어버린다. 편안함에 취해 자신의 감정에도 무뎌지고,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는 사라진다.


반면 양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이기에, 사람을 향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상대를 끝없이 공부하기 위해 표정을 읽고, 숨소리를 따라가고, 상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양은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깊이 이해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상대가 느끼는 슬픔의 안색을 보았고, 그 이유를 공부했으며, 그러기 위해 기꺼이 곁을 지켰다. 그리하여 그 사람만의 슬픔을 알아갔다.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고 할 때, 오히려 가장 사랑의 형태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듯한 존재는 양이었다.

 


차 한 잔에 세상이 들었다는 말을 믿으세요? 장소와 시간을 맛볼 수 있다는 말.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차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좋아요. 정말 아름다워요. 찻잎이 피어나고 물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모습이요. (...) 차에 관한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소와 시간까지도요. 

 

 

제이크는 찻집을 운영한다. 영화 속에서 차는 단순한 직업적 설정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아득한 복잡성을 담아내는 은유로 등장한다. 영화는 차 한 잔에 대한 정의도 쉽게 말해주지 않았다. 찻잎이 떨어지는 소리, 물이 고이는 소리,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 잔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 코끝에 번지는 향과 손끝에 닿는 온기, 그리고 온몸 안쪽으로 천천히 퍼지는 깊은 기운까지.

 

더 크게 확장해 보면 그 안에는 공간의 소리와 창가로 스며드는 빛, 눈앞에 앉은 사람의 시선과 목소리가 함께 담긴다. 더 깊이 파고들면 차 한 잔에는 그 찻잎이 자란 지역의 기후와 날씨, 땅의 성질, 잎을 딴 농부의 손길, 그것을 사고 먼 곳으로 옮겨와 누군가에게 건네기까지의 수많은 여정과 기억이 스며 있다.

 

차 하나가 품은 세계를 세상의 빈약한 단어들로 겨우 설명하는 일도 이토록 어려운데, 사랑을 정의하고 사람을 규정하려는 행위는 얼마나 오만한가. 나아가 내가 이해한 사랑의 모양을 타인의 세계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정서적 게으름은 얼마나 성급한가.

 

 
제이크
영화에서 차를 찾는 그 과정이 인상적이었어. 이 복잡한 물질을 추적하고 그걸 흙, 식물, 날씨 그리고 삶의 방식과 연결하는 과정 (...) 차를 찾는 남자가 독일 친구한테 차 맛을 묘사 못하겠다면서 묘사할 말이 없다고 말해. 차의 신비한 성질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가 없다고.

 

그러니까 옆에 서 있던 독일 친구가 ‘맞아, 근데 상상해 봐. 넌 숲속을 걷고 있고 땅에는 나뭇잎이 깔려 있어. 한참 비가 내리다 그쳐서 공기는 아주 축축하지. 넌 그런 곳을 걸어. 왠지 이 차에는 그 모든 게 담긴 것 같아.’ 나는 그 묘사가 무척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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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기억 속에서 제이크는 에이다를 발견한다. 복제 인간(클론)으로 암시되는 에이다와 양의 관계에 대해 영화는 쉽게 정의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양을 찾고, 추억하고, 그의 멈춘 몸을 어루만지는 에이다의 장면으로만 보여준다.


그들의 관계가 인간이 규정한 사랑에 부합하는지, 혹은 정교한 데이터의 교환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양이 누군가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의 온기를 기억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만들어진 존재와 복제된 존재가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은 묘한 울림을 준다. 둘 다 ‘진짜’라는 날 선 기준에서 언제나 밀려나는 존재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의 고유함을 온전히 알아보려 했던 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존재가 품은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해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타인의 기억을 끝까지 추적해 볼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만의 닫힌 세계 속에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가고, 또 사라진다. 그렇기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언제나 불가능에 가깝고, 그래서 한참 늦다.

 

가혹한 것은 그 이해가 시작되는 순간이 대체로 존재가 소멸한 이별 후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누군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나와 그’라는 관계의 중심축을 벗어나, 그의 곁에 외롭게 남아 있던 흔적들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매만졌던 사물들, 가만히 바라보았던 풍경, 무심히 지나친 길, 머물렀던 공간의 숨결, 창문 너머로 들려왔을 희미한 소리들. 그가 없던 나의 시간처럼, 나 없이도 흘러가고 있었던 그의 시간의 무게 그리고 그가 만든 생의 고유한 결을 뒤늦게서야 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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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빛과 나무를 자주 비춘다. 양의 기억 속 빛은 정보가 아닌 그가 느낄 수 있었던 생생한 감각이었다. 효율적인 기록을 위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 순간이 자신이라는 존재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남긴 영혼의 인화지였다. 나무는 양에게 생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뿌리를 내린 존재,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자라는 존재, 빛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변해가는 존재. 뿌리를 찾아야 하는 입양아 미카와, 뿌리 없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양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정체성이란 태어난 출신 성분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고, 기억하고, 연결되는 시간 속에서도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사랑과 가까운 순간을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면, 사랑한다는 고백의 순간보다도 상대를 온전히 궁금해하는 일이 더 사랑과 닮은 것 같다. 기억의 서랍 속에 편리하게 분류해 넣어두었던 상대를 다시 꺼내어 자세히 들여다보고, 때로는 내가 정립해 둔 관계의 모양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어려운 결심을 요구한다.

 

양에게 그것은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타인을 위해 기억을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저장했으니까. 그러나 인간인 제이크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을 너무 당연한 의무로 여겼기에, 정작 ‘사랑’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제이크는 양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깨닫는다. 자신의 사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행복을 궁금해해 주고, 무심히 흘려보낸 순간들의 의미를 물어봐 주던 ‘양’이라는 세계가 영영 사라졌음을. 그의 상실은 그렇게 끝에서야 시작되었다.


 

고대 중국의 철학가 노자도 이렇게 말했죠. ‘애벌레는 끝이라 부르지만, 나머지 세상은 나비라 부른다.’

카이라 그 말 좋다. 너도 그 말을 믿어? 끝은 곧 시작이라는 말.

모르겠어요. 그런 믿음은 프로그래밍되지 않았거든요. 어떤 것 같으세요?

카이라 그렇게 믿고 싶어. 가끔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그런 믿음이 프로그래밍이 된 것 같은데 그게 정말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

솔직히 얘기해도 될까요? (...) 저는 괜찮아요.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요. 저는 이렇게 프로그래밍 됐나 봐요.

카이라 그래서 슬펐던 적도 있어?

글쎄요.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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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를 내 기억 안에 들인다는 것. 그것은 연결의 시작이다. 이야기를 듣기 전의 무구한 상태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고, 그 이후의 내가 송두리째 달라질 것을 알면서도 연결을 선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유한한 생명체가 가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힘일지도 모른다.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고, 살아갈수록 죽음과 서늘하게 가까워지는 생의 비극을, 두려움이 아닌 서로의 이야기들로 채워 넣으며 다가오는 종말을 함께 견뎌내게 만드는 힘.


우리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이 주는 얄팍한 안도감 속에 머문다. 안전함은 이내 편안해지고, 그 편안함 속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곁에 있는 존재가 홀로 품고 있는 깊은 슬픔을,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고독한 시간을,

나 없이도 계속해서 박동하고 있었던 그의 거대한 세계를.


그럼에도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슬픔을 보려고 기꺼이 고개를 돌린다. 그가 말하지 않은 어둠의 깊이를 묻고, 그가 닫아 놓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만약 누군가에게 사랑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그 문장을 지을 때 이런 마음을 담고 싶다.


함께 행복해하고, 좋아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안락함 속에서도, 문득 상대의 표정에 어린 옅게 번지는 그늘 그 아래로 들어가보는 것. 혼자 있었을 시간을 걱정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상대의 손을 잡고, 밤의 정적을 깨며 함께 물을 마시러 가주는 것이 사랑인 것 같아서.

 


I Wanna Be

I Wanna Be

I Wanna Be Just Like A Melody

Just Like A Simple Sound

Like In Har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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