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는 꿈을 자주 이야기한다. 꿈은 살아간다는 생동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며, 미래에 대한 기대이자 지금의 현실을 견디게 하는 명분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되고도 연약한 자원인 꿈. 그것은 언제나 상상에서 비롯된다. 아직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며, 증명되지 않은 것. 그래서 타인이 품은 꿈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본 것, 들은 것, 만진 것, 느낀 것을 믿는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 더구나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내면에서 자라난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 지난한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이름이 애정, 사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애정은 누가 준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원한다고 선뜻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이유들로, 혹은 이유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미지의 연결들로 복잡하게 얽혀 자라나기에 어쩌면 가장 추상적인 감정일 것이다.
우리는 오직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각자의 꿈을 품고 살아간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이들에게 응원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이해라기보다는 존중,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을 지켜주고픈 마음에 가깝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상대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결국 나의 꿈은 영원히 나에게만 가장 선명하고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꿈을 품은 자의 곁에는 필연적으로 고독이 뒤따른다.
누군가 동료들과 발걸음을 맞추지 않는다면 다른 북소리에 맞춰 걸어가기 때문이다.그가 듣고 있는 박자에 따라 걷게 내버려두라.
어떤 노래이건, 어디서 들려오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가닿지 못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본다. 변화하는 계절, 햇살을 머금은 풍경, 풀잎을 두드리는 소리, 노래하는 새, 온 마음을 숨기지 않는 동물들.
이 사소하고 찬란한 것들은 삶이 고독과 우울, 절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작은 징표이며, 혼자라는 감각 속에서도 기꺼이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생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세상의 아름다움만을 품으려는 태도는, 내가 타인에게 내 꿈을 무조건 이해해 주길 바랐던 것처럼 내 안의 또 다른 오만을 비춘다. 세상으로 눈을 돌릴수록 인간은 더 자주 압도된다.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 그 안에서 미세한 먼지보다도 작고 덧없는 자신. 영원히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을 것이며, 내가 보는 세계란 전체의 극히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는 직시는 이따금 우리를 깊은 절망에 빠뜨린다.
하지만 희극과 비극이 서로의 경계에 맞닿아 있듯, 절망 역시 희망과 겹쳐있다. 그 거대한 절망 안에서 오히려 묘한 위로가 피어난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꿈을 품고 살아도, 그것이 세상 전체에는 아무런 흠집도 내지 않는다는 사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쓸모없는 짓처럼 보이더라도, 애초에 '쓸모'라는 것 자체도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임시의 기준에 불과하다는 것. 쓸모를 증명하는 일 역시 내가 품은 꿈과 다를 바 없는 허상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거창한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이라기 보다, 그저 생명이 주어졌으므로 호흡하고,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 소박하고도 거창한 자각에서 의미는 다시 시작된다.
도서 『타샤의 기쁨』 속 인용구들에는 타샤가 지나온 혼란과, 간절히 바랐던 위로,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의미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어떤 날에는 고독 속에서도 꿈의 가치를 꽉 붙들려 했고, 어떤 날에는 우울과 후회 속에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했다. 때로는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계속해서 꿈과 삶,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삶은 대체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내일에 대한 걱정이 더욱 자주 차오르기에, 그녀는 더더욱 '오늘'에 의미를 두려 노력한다. 거창한 성취보다 하루를 다독이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만 오늘을 버텨내고, 이따금 가빠오는 호흡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듯이.

현실 속에서 꿈과 삶이라는 환상은 너무도 쉽게 흐려진다. 반복되는 비극, 불안, 우울, 후회는 우리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환상을 조금씩 지워낸다. 더 넓은 땅, 더 많은 자본, 더 큰 권력을 향해 포식자처럼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는, 누군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꿈을 지워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 여겨진다. 하나의 거대한 욕망이 정답처럼 제시되고 모두가 그것을 따르도록 설득될 때, 소수가 원하는 허울뿐인 세계는 너무도 쉽게 완성된다.
그러나 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무형의 허상이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한없이 부풀려져 높이 치솟고, 어떤 날에는 아득히 흐려지며 땅으로 가라앉는다. 꿈이란 한 번 손에 쥐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탐해야 하는 무형의 힘이기에,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의 얼굴을 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잡아먹힐 듯 위태로운 내 꿈과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치열하고 처절하게 분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내 꿈은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그것이 생명과도 같은 가장 가치 있는 의미다. 오직 나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내 세계. 그곳에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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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세상은 아무런 의도 없이 고요한 공간이다. 그 속의 모든 가치는 인간이 빚어낸 것이다. 의미를 품고자 할 때 비로소 의미가 태어나고, 쓸모 있어 보이도록 교묘하게 조립해 타인을 납득시킬 때에야 비로소 쓸모를 인정받는다. 세상 만물은 이토록 무의미하고, 생명은 찰나이며, 죽음은 늘 곁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몫은 단 하나뿐이다. 단 한 번 주어진 이 찰나의 영원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에 답하는 일.
어떤 날은 고민과 걱정으로, 어떤 날은 환희와 희망으로, 어떤 날은 좌절과 우울로, 또 어떤 날은 평온과 호흡으로 하루를 견딘다. 내가 가만히 멈춰 서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고, 세상 속으로, 혹은 사람들 사이로 뛰어드는 순간 소란은 시작된다. 세상은 언제나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고, 우리의 움직임으로 나의 세계는 조립되어 간다.
이 순간이 영원이다.
나는 그 한가운데 있다.
햇살 속에 있는 나.
빛이 내리는 공기 중의 나비처럼 햇빛 속에 있는 나.
무엇도 필요치 않다.
이 순간이 바로 그것이니.
이 순간이 영원이다.
지금이 영원한 삶이다.
리처드 제프리스, <내 마음의 이야기>
그러니 주어진 삶을 나만의 아름다움으로 채워나가는 일은 결코 순진한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나의 세계를 침범할 때 꿈은 나의 무기가 되고, 무의미의 한가운데서 스스로 의미를 길어 올려 호흡을 지속하려는 숭고한 투쟁이다. 타샤가 말하는 기쁨은 바로 그런 곳에 있다. 손 닿는 곳에 놓인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찰나에 스쳐간 희망을 오래 기억하며, 그것으로 미지의 세상을 살아내는 일.
모두가 고요함뿐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하게 가꾸어 기어코 기쁨을 수확하고, 찰나에 불과한 이 기적 같은 생을 가장 찬란하게 누빌 수 있기를 응원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