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으레 하와이안 셔츠를 걸친 산타, 모래 눈사람의 생소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만큼이나 북반구에 사는 사람에게는 생경할 것이 푹푹 찌는 여름 자정에 맞는 New Year다.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한파에 떨며 입김서린 새해 소망을 말하는 대신, 옆사람과 닿는 끈적한 피부, 한껏 고조된 열기 속에서 맞는 새해. 남반구의 새해는 그런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태닝 산타가 매년 찾아오는 호주에서 서른 밤 동안 한여름 밤의 꿈을 꾸게 되었다. 가족과의 두 번째 캠핑카 여행지이자,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가족여행. 지난 추억이다.
12월의 한국이 으레 그렇듯 롱패딩 없이는 버틸 수 없는 혹한기였다. 큰마음을 먹고 패딩을 차 뒷자리에 던져두고, 두 손을 겹쳐 팔을 비비며 공항 터미널로 들어갔다.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쯤에야 몸이 조금 풀렸다.
그런데 비행기는 이륙하지 않았다. 기체 결함이라는 안내 방송이 울리고, 가득 찬 승객들은 이륙도 전에 도로 내렸다. 다행히도 밤 직항편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엄마의 말로는 그 비행이 역대 중 손에 꼽힐 만큼 심한 난기류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륙하자마자 곯아떨어져 그런 줄도 몰랐다.
꿈에서 나마 롤러코스터를 탔을지 모르겠다.
시드니 공항 문을 나서자 추위와 더위의 절충안으로 골랐던 얇은 긴팔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었다. 적도를 넘어, 계절을 넘어 떠난 길이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한 달치 짐을 이고 지고 숙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겹친 살갗에서 땀이 맺혔다.
첫 끼니는 숙소 근처 맥도날드였다. 이른 시간이라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체크인을 마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창문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식사는 숙소에서 끓인 라면과 햇반이었는데, 한 해의 마지막 식사라고 하기에는 꽤 조촐한 메뉴였다.
저녁 8시경, 시드니의 새해 전야제를 보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전 세계에서 약 200만 명이 몰려든다는 그 밤이었다.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진을 치고 앉아 있던 사람도 있었다. 도로 곳곳이 통제되어 있었고 오페라하우스 근처 서큘러키 역은 아예 폐쇄되어 있었으며, 형광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들이 군중의 흐름을 구역마다 나누어 정해진 방향으로만 걷게 했다.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어딘가로 계속 이동했다. 키가 어른들 허리쯤밖에 되지 않던 동생은 사방에서 눌러오는 인파에 울음을 터뜨렸고, 우리는 겨우 하버 브리지의 끝자락이 저 멀리 보이는 어느 지점에 겨우 멈춰 섰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예열하듯 작은 불꽃들이 하늘 위로 터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한 해를 잘 보내게 해달라는 염원을 범벅칠하고 있었을까. 여름이 그런 각성을 이끌어내는 데 적합한 계절이었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수백만 군중의 "Happy New Year!"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는 기대가 "One"까지의 카운트 후에 들려온 '와아—' 하는 거대한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뿐이다.
폭죽이 끝나자 사람들은 생각보다 정연하게 흩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몇 개 정거장을 건너 폐쇄되지 않은 역으로 갔지만, 지하철은 몇십 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플랫폼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는 동안 우리는 끝까지 남아 기다렸고,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TV에서는 간 밤의 휘황찬란한 불꽃과 갑작스러운 지하철 운행 중단 소식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새해가 시작 되던 그 밤이 지나고 캠핑카 여행이 시작되었다. 시드니에서 출발해 케언즈까지, 한 달을 길 위에서 보내는 여정이었다. 차가 익숙하지 않은 쪽 차선을 달리는 동안 여름은 계속되었다. 살갗이 점점 거무스름하게 탔고, 여행을 맞아 노란빛으로 물들였던 머리가 햇빛에 더욱 밝아졌다. 그러나 살갗은 다시 하얘졌고, 머리칼도 새학기가 되자 까맣게 덮였다.
그 이후로 수 번의 여름이 지나 갔고, 이제 다시 여름의 길목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