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상당히 폭력적인 문장이다. 세상만사가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지나친 축약은 언제나 오해를 동반한다. 그러니 나는 하릴없이 왜 나를 부정적인 인간으로 정의 내렸는지를 성실하고도 충분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춘기를 겪고 성인이 되어 세상을 경험한 이후 줄곧 부정적인 인간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한 사람으로서 나라는 개인을 수식하는 ‘부정적이다’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풀어내 보려고 한다. 자기 행동을 책임지고 뱉을 말의 무게를 감당하는, 그것이 어른이니까.
‘코끼리는 왜 코끼리인가? 그것이 코끼리이기 때문에 코끼리라고 한다면 이는 긍정의 답변이다. 반대로, 코끼리가 아닌 모든 것이 코끼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코끼리라고 답한다면 이건 부정의 답변이다. 어쩌면 세상이 부정성을 기피하게 된 건 이런 연유 탓인지도 모르겠다.
긍정에 비해 부정적 문장은 벌써 말이 길고 복잡하며 헷갈린다. 긍정의 문장을 다시 한번 보자. 이 얼마나 깔끔하고 간단명료한가. 그것이 우리가 긍정성에 사로잡히고, 세상이 긍정을 퍼트리는 이유다. 간단명료라는 건 누구나 쉽게 흡수할 수 있고 그만큼 퍼트리기 용이하다는 뜻이다.
세상의 시스템은 더 많은 걸 잡아먹으려고 하지 그 확장에 제동이 걸리는 걸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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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부정적이다. 모든 게 남들보다 한 발짝 정도 느린 삶을 살아왔다. 이렇게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세상이 표준화 시켜놓은 흐름에 편승했던 적이 드물다.
단순명료보다 복잡다단을 좋아했다. 20살부터 그랬다. 남들은 부모님께 용돈도 받고 알바도 하면서 대학에 다닐 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1년을 다니면 1년을 휴학해서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으로 1년을 다니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대학도 한 번 옮겼다.
나에게 취업하기 좋은 곳에 가서 돈부터 벌고 하고 싶은 거 찾으라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을 다 해봤다. 그렇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찾는 시간을 2년 정도 보냈다. 그 여정 끝에 지금의 전공을 찾아 마침내 졸업했다.
언제나 질문을 달고 살았다. 모두가, 혹은 다수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움직이기 전 잠시 멈춘다. 나는 왜 이걸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나름의 이유를 찾고 그 이유에 납득한 뒤에 움직인다. 세상은 헤엄을 멈추면 죽어버리는 상어라도 되는지 끊임없이 움직이려고만 한다.
질문을 없애고,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는 정석이라는 길을 사방으로 깔아놓는다. 그 ‘정형’이라는 인프라는 적응이라는 미끼로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 앞의 부정을 잡아먹는다. 나는 그 흐름을 이탈한 덕분에 이렇게 피곤하고 힘든 삶을 사는 중이다.
한 걸음 정도 뒤처지는 보폭으로 걸어 온 삶 덕분에 남들은 놓치고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느림의 다른 이름은 다양함이었고 뒤처짐의 다른 이름은 풍부함이었다. 큰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나는 부정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것 같다. 지금까지 겪어 온 시간 속에서 누렸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들이 안겨주는 삶의 풍부함은 이제 와서 끊어내기에는 너무 매력적이고, 중독적이다.
긍정이 없다면 부정도 없기에 한쪽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많은 사람이 긍정의 삶을 충분히 겪어봤으면 한 번쯤 부정의 삶도 겪어봤으면 한다.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삶이 한쪽으로만 가는 삶보다는 즐거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