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매력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대중의 찬사를 받은 책을 펼쳤다. 두꺼운 벽돌 책이라 언제 다 읽을까 싶었지만,앉은 자리에서 4시간, 또 앉은 자리에서 4시간 그렇게 책을 다 읽어버렸다. 잠이 오지 않아서 읽었는데 오히려 밤을 새게 되는 굉장한 책이다.
아마 너무 유명한 책이여서, 오히려 기대를 더 접고 읽기도 했다. 아무도 몰랐던 책에서 발견한 재미와, 이미 유명한 책에서 발견한 재미는 결이 다르다. 그런데도 책장 한장한장 넘기는 게 너무 흥미로웠고, 점점 페이지 수가 줄어드는 게 너무 아까웠다.

"우리 태양이 10% 어두워지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태양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원인은 태양의 빛 에너지를 흡수해 살아가는 외계미생물 ‘아스트로파지’로, 이들은 항성의 에너지를 최대 10%까지 차단하며 태양 뿐만 아니라 주변 별들까지 감염시키고 있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태양 빛은 계속 어두워 질 것이고,인류 멸망은 확실한 상황이다.
그런데 태양과 비교적 가까운 별들조차 점점 어두워지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행성 ‘타우 세티’만은 밝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인류는 그곳에 아스트로파지의 번식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주선 '헤일메리호'를 완성한다. 주인공 그레이스는 이 헤일메리호의 승조원으로 선발되어, 인류의 생존을 건 임무를 안고 타우 세티를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상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레이스는 놀랄 만큼 선하고 온순한 인물로, 스트라트가 무례하게 대하거나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려도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며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극한의 고립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성격으로, 기억을 잃은 채 우주선에서 깨어난 상황에서도 공포나 혼란에 휩쓸리기보다 농담과 자기합리화를 통해 스스로를 다잡는다. 특히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이라는 비극만 아니었다면 누구보다 즐거워했을 정도로 아스트로파지 자체에 강한 호기심과 애정을 보이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진심으로 흥분하는 전형적인 과학자 기질을 드러낸다.
로키는 항성 ‘40 에리다니’의 에리드 행성에서 온 지적 외계 생명체로, 그의 고향 별 역시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되어 그레이스와 같은 이유로 타우 세티에 도달했다. 본래 23명이 함께 출발했으나 항해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동료들이 모두 사망하고, 로키만이 홀로 살아남는다. 그레이스는 이 외계 생명체에게 ‘로키(Rocky)’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레이스가 과학자의 역할을 맡고 로키가 엔지니어로서 기능하며 함께 아스트로파지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간다.
"뭐 이젠 혼자가 아니야, 친구. 우리 둘 다."
- P.310 그레이스의 말 중
광막한 우주에서 함께 온 동료들이 모두 죽고 홀로 남은 상황에서, 같은 목적을 품고 온 또 다른 우주선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압도적인 안도와 반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언어도, 종족도, 목적도 완전히 다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는 이미 특별해진다.
각자는 분명 자신만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로키는 자신의 별을 구해야 했고, 그레이스는 지구를 구해야 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상대를 포기하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는 상황도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가 죽을 수도 있었던 순간마다 상대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서로를 한 번, 두 번, 그리고 끝까지 살려낸다. 이 소설이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바로 여기다. 생존을 위한 계산이나 의무 때문이 아니라, 같은 위기에 놓인 생명체라는 인식이 서로가 서로에게 극단적으로 이타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점이다. 혹은 어쩌면,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이타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였기에 그 관계가 가능했을지도.
처음에는 임무였던 동행은 어느 순간부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상대의 생존을 진심으로 바라는 관계로 변해간다. 협력이나 동맹을 넘어, 서로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고 행복의 이유가 되는 관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구원담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로키는 외계인이지만,,)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오래 남는다.
"나를 그리워 할 것임. 질문?
나는 너를 그리워 할 것임. 너는 친구임"
- P.612 로키의 말 중
이 책이 결국 나에게 남긴 것은 대단한 영웅담도, 반전도 아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함께 지나온 시간을 나누며, 몰랐던 부분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 조차도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로키는 함께 온 대원들이 모두 죽은 뒤, 60년이 넘는 시간을 홀로 우주선에서 버텨왔다. 그레이스 역시 동료를 모두 잃은 존재였기에, 그런 로키에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은 ‘좋음, 좋음’, ‘나쁨, 나쁨’ 같은 단순한 단어들에 불과하다. 언어가 다르기에. 그럼에도 그 느낌들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전해진다. 서로 다른 별에서 태어난 두 존재가 각자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우주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도 쉽게 믿기 어렵지만, (나는 그런 도전을 할 사람 자체가 아니기에) 그 마음이 너무 진심이어서, 너무 예뻐서 계속해서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끝난 후 그 모든 것들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두 주인공이 지닌 선함과 착한 마음씨가 이야기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지고 나 역시 '헤일메리호'에 함께 승선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원래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읽은 책 중에 최고의 평을 주고 싶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누군가의 상상을 빌려 활자로 접할 수 있다는 건, 생각할수록 큰 축복이니까. SF물은 좋아하려고 해도 늘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의 끝은 결국 어려운 과학이나 우주학이 아니라, 그 어떤 본질적인 지점으로 수렴되는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다. 결국 SF의 진짜 매력은 복잡한 공상과학 이론을 완벽히 이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 과학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겨진 인문학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그 지점, 거기서 진짜 재미가 오는 것 같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