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저들끼리 악보를 그려내듯 휘몰아치는 타자기 소리, 천장까지 치솟아있는 문서들.
이 사이에서 바틀비는 허리를 치켜세운 채 가만히 앉아 있다. 그저 앉아 있을 뿐이다. 며칠 전부터 바틀비는 업무를 거부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사가 내린 지시에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라고 말하는 반항에 더 가깝다. 차라리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집어 던지거나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가래침이라도 뱉으면 경찰에 신고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바틀비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만한 인품의 사람도 아니었다. 여기서 독자를 더 당황하게 하는 부분은, 그를 고용한 변호사이자 이 글의 화자인 인물이 그런 바틀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틀비는 저항하는 사람치고는 줄곧 점잖은 태도를 유지해 왔으며, 겉으로 보기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물론 나는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다른 직원들의 정신적 피해까진 다 알지 못한다) 그런 바틀비에게 화를 냈을 경우 자칫하면 본인이 이상한 사람처럼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변호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뉴욕 월스트리트다. 이곳은 전 세계 증권의 중심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대하고 그만큼 모두가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해낸다. 아니,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굴레 안에서 생산성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이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톱니바퀴의 한쪽 부품이 삐걱거릴 때마다 변호사의 인내심은 갈수록 한계에 가까워진다. 녹슨 부품은 마치 불협화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필경사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단편으로, 월가의 변호사 밑에서 새로 일하게 된 필경사 바틀비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거부하며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바틀비는 상사의 지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의 저항은 여느 극단적인 투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보다 체념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아직 완전히 자리 잡기 전, 과도기 속에서 바틀비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가기보다 홀로 우뚝 서기를 택한다. 나는 바틀비의 이러한 선택이 작품 속 그 어느 행위보다도 가장 주체로서의 능동성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를 ‘우뚝 서기’라고 표현한 데에는 물론 그의 내면에 내재한 굳건한 결의도 있거니와 그의 관망적인 태도인 탓이 크다. 바틀비는 결국 자신으로 인해 사무실이 옮겨지고 그 공간에 새로 들어올 담당자가 찾아온 순간에도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여러 겹의 시간과 사람이 서로 스치고 쌓이고 포개어지는 과정을 한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냈다. 업무 성과를 내기 위해 숨 쉬듯이 자판을 두드려야 하는 곳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관망하는 자세는 역행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바틀비의 이러한 행위를 단순히 물줄기를 거스르는 방해물로만 보고 싶지 않다. 그 누구도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이라고 해서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듯이. 대신 나는 앞서 제시된 개념보다 훨씬 더 초월적인 존재로 해석하려 한다. 관망은 한 개인의 능력을 벗어난, 초인적인 존재에게만 부여되는 마법과도 같다. 이것이 내게는 다소 신의 능력처럼 다가온다. 나는 그에게서 신의 면모를 보았다. 바틀비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 속 주체성을 상실한 한 명의 소시민이 될 수도, 한 시대를 관망할 줄 아는 주체적 초인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 바틀비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의 저항, 체념 누군가에게는 그저 무기력함 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것들만은 잔존한다. 바틀비는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그 사무실의 창가 자리 혹은 변호사의 기억 저편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