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밤, 2025년의 마지막 연극을 보고 나왔다. 올해 처음으로 본 연극과 같은 극장에서 관극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묘한 기쁨이 있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던 밤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기념일답게 연인들이 많았다. 평소보다 더 의식하게 된 것은 직후 보고 나온 연극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건 사랑에 관한 연극이었다.
가장 많이 불리는 감정이자 상징,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 있다면 분명 사랑일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고 보편적이라 생각했던 사랑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올해 두 번 정도, 두 편의 연극을 보고 나서 그렇게 되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지금껏 내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적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갖게 한 두 편의 연극을 기록하면서 나의 2025년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올해 5월에 보았던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라는 극이다. 강렬한 포스터와 단 3일간의 내한 공연이라는 점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안젤리카 린델이 창작자이자 퍼포머로서 보여주는 무대 위 공연은 매 순간 놀라웠고 섬찟했다. 예술가인 자신을 투우사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무대 위에서 모두 소진할 것처럼 쏟아부었다. 죽음의 의식과도 같은 그 공연에서 린델은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 그리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이 지금 여기에 현현하게 했다.
두 번째 극은 이브날 신촌극장에서 본 <출현하는 텍스트: 사랑의 가능성>이다. 무대 위 테이블에는 여러 전자 악기와 마이크들이 섞여 있었고, 객석 뒤편에는 관객들을 위한 위스키, 와인, 차가 있었다. 배소현은 “텍스트가 이미 연극이며, 몸이 이미 극장”이라는 자신의 표현에 걸맞게 스스로의 몸으로 텍스트를 표현해냈다. 그것은 때론 짧은 호흡이거나, 발화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노래기도 했다. 넓은 공간감을 주는 음악 위로 차곡차곡 말과 행위를 쌓아 올리다가 종국엔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는 그렇게 만든 폐허 위에서 다시 자신의 삶을, 사랑을 선언했다.
이 충격적인 경험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예술이 곧 자기 실천이 될 수 있을지에 관한 개인적인 고민에 제시된 대안이기도 했다. 퍼포머는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 위에 서서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아픈 이야기까지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개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세계까지도 확장된다.
두 극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모순과 불평등, 원죄나 다름없는 업보에 대해 말한다. 이를 외면하고, 구조에 순응하고, 어떤 생명을 당연하게 죽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사람들의 감정과 태도에 대해 말한다. 수치심, 죄책감, 고통, 욕망을 끊임없이 파고든다. 그렇기에 극은 당연히 불편하다. 퍼포머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해체하고 헤집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함께 고통스러워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홀로 감당하는 퍼포머를 마주하길 두려워한다. 퍼포머의 자기 해체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 또한 자기 내면을 스스로 도려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게 되고, 무엇이든 계속해서 성찰하게 된다. 마침내 수행이라는 저항을 통해 가장 고통스러운 삶에 맞선다.
두 극의 시작이자 끝은 모두 사랑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곧 진실한 삶의 실천이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이유이자 동력이다. 그렇기에 퍼포머는 삶을 감히 함부로 포기하지 말라고 외친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기에, 오직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만 목숨을 바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대 위에서 그것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한다.
린델의 극을 봤던 당시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퍼포먼스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저렇게는 못 살아.’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무대 너머 전해지는 선명한 고통에 동화될 용기도, 자격도 없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그간 직면한 여러 문제와 뒤따른 고민에 대해 가장 명료하게 화답한 것은 다름 아닌 그 두 편의 극이었음을, 이브 날 신촌극장을 나오면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물음 또한 생겼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이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의 내 행위와 감정들을 모두 되짚어가다 만나게 된 ‘사랑’은 어느 때보다도 낯설고 멀게 느껴지게 되었다. 극에서 말해지는 사랑을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 의심되기도 한다.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적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다짐으로 마치고자 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뭉뚱그리는 사랑, 안전한 거리에서만 바라보던 사랑에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겠다고. 완전하지 않아도 서툴고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는 일임을 이제는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무대 위 퍼포머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삶을 향해 진심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으로 남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사랑을 배우는 자리부터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