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한 첫 학기에 들었던 한 수업이 생각난다.
'법' 그리고 '젠더'라는 흥미로운 두 단어의 조합에 호기심으로 수강을 신청했던 교양 수업.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듣기 시작한 그 교양 수업은 20여 년간 굳건히 쌓아 올린 내 신념체계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젠더법학 관련 판례를 살펴보며 내가 믿어 온 사회 체계가 항상 정의로운 것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크기변환]프리마파시 포스터.jpe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16002517_eyoesqsy.jpeg)
연극 <프리마 파시>는 몇 년이 지난 교양 수업의 충격과 배신감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프리마 파시>의 첫 장면은 주인공 테사가 변호사로서 참여하는 한 재판이다. 테사에게 재판 과정은 흥미진진한 '게임'이고, 변호사로서 게임에 참여하는 자신은 승리를 위해 달려가는 '경주마'다. 테사는 법정을 자신의 무대처럼 자유롭게 누비며 반대 심문을 이어나간다.
테사는 증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법이라는 제도의 권력을 여유로이 휘두른다.
![[크기변환]프리마파시2.jpe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16002539_ynzbguht.jpeg)
테사 엔슬러는 최근 몇 달간 '1등', 즉 승소로 레이스를 통과했던 유망주 변호사다. 노동자 출신인 테사는 치열한 경쟁 끝에 옥스퍼드에 입학했고, 마침내 변호사 자리를 얻어냈다.
테사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마지막 관문인 ‘왕실 변호사’까지 올라가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다. 택시가 손님을 가려 태우지 않듯, 테사 역시 어떤 사건이든 최선을 다해 맡는다. 그게 설령 성범죄자를 변호하는 사건일지라도. 퇴근 후 재판에 이겼다고 말하는 테사에게 테사의 어머니는 "네 덕분에 범죄자 1명이 또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게 됐다"라고 응수한다.
승소와 성공만을 바라보며 7년간 변호사로서 질주하던 테사는, 극 중반에 이르러 성폭행 피해자가 된다. 일명 ‘썸’을 타는 관계였다는 점, 예전에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는 점, 상대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침대로 끌여들었다는 점에서 테사는 법, 그리고 법을 둘러싼 체계들과 홀로 맞서야만 한다. 잘 생각나지 않는, 782일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증언만을 가지고.
테사는 극의 제목이기도 한 ’프리마 파시(Prima Facie)’- 즉 피해자가 법적으로 자신의 진실을 입증해야만 사실로 간주되는 법체계-에 스스로 맞닥뜨리게 된다.
![[크기변환]프리마파시4.jpe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16002555_wciwdtpd.jpeg)
테사는 해당 재판이 어떤 판결로 기울 가능성이 높은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테사는 성폭행 피해 이후 긴 법정 싸움으로 인해 공황, 해리, 그리고 자해를 비롯한 다양한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테사는 재판을 포기하지 않는다. 증인으로 법정에 서서 증언하며, 불공정한 법제도에 정면으로 맞선다.
테사는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미래에 자신의 위치에 설 여성들을 위해 나선다.
난 여기 있어.
그리고 앞으로
침묵 당하지 않을 거야.
![[크기변환]프리마파시3.jpe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16002710_evxtwrsn.jpeg)
연극 <프리마 파시>는 이 모든 과정을 배우 한 사람이 이끌어 나간다. 관객은 거만한 태도를 지녔던 변호사 테사가 마지막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법의 변화를 촉구하는 모습까지, 배우 한 명의 호흡을 따라가게 된다.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벽 앞에 선 테사는 진실과 변화를 향해 외친다. 그 울림은 관객의 마음속 깊이 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뚜렷한 주제 의식은 끝내 해외 관객으로부터 행동을,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한국에서도 <프리마 파시>를 관람한 관객의 깨달음이 작은 변화의 불씨가 되기를 바란다.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 세 배우가 각각의 개성을 통해 만들어나가는 1인극 <프리마 파시>는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