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마친 후, 두 가지의 의문으로 영화를 한참 곱씹었다. 첫 번째는 머릿속을 빙빙 도는 영화감독의 이름이었다. 1920년대의 에른스트 루비치가 영화 내에서 맴돌았다. 특유의 ‘루비치 터치’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정도로, 치명적인 대위법을 가진 영화는 곧 션 베이커의 영화로 현현했다. 두 번째는 성장에 대한 정의였다. 물론 <아노라>에서 대사로 강조되던 ‘사랑’을 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물의 생장점이 드러나는 사건들은 올곧게 사랑의 결말을 비극으로 내몬다.
다만 <아노라>가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있으며, 특유의 스크루볼 코미디적 문법을 사용했음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의외로 간단하게 무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노라는 슬픔과 행복의 대위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 초반부부터 꾸준히 등장한 아노라의 행복과 이반과의 사랑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이고르와의 마지막 관계는 이들이 말하던 정의와는 이질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즉 어떠한 로망의 측면에서 사랑을 논하기에는 영화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다르게 본다면 사랑과 성장은 다르면서도, 같은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지키고 이겨내면서 성장은 발생한다. 생장점에 상처가 날 수록 돌연변이는 쉽게 발생하고, 네잎클로버가 되거나 혹은 망가지고 만다. 이반에게 결혼은 그런 것이다. 토로스 형제와 이고르의 관계성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 아노라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감정들을 착취한다. 이것이 육체적 쾌락이나 미국 영주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반에게 아노라는 곧 성장의 상징 그 자체로 발현된다.
이반은 만나기 전의 아노라의 삶은 화려함과 현실 속 사이에 존재했다. 밤에는 ‘HQ’라는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지만, 낮에는 기차가 지나다니는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어를 하는 부자 손님을 만난 뒤에는 삶의 일치가 이뤄지듯, 한 걸음 나아가듯 보였다. 이반은 구글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유명한 부자의 아들이다. 매일 같이 파티와 쾌락으로 점철된 이반의 삶은 멀리서 보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다만 아노라에게 청혼을 하는 이반의 모습은 오로지 쾌락에 점철되어 있는 모습 뿐이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아노라는 이반에게 안정감을 느꼈을 수 있다. 실제로 토로스 형제와 이고르가 찾아왔을 때, 아노라는 이반과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항한다. 발로 차고, 물건을 부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려함을 벗어던진 아노라에게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찾을 수 없게 된다. 특히 도망친 이반을 찾으러 가는 길, 이차원 속의 카메라에 인물들을 가두어버린다. 고전 영화의 구도와 매우 유사한 이 작품은 과거에 희미해진 스크루볼 코미디를 연상케 만든다.
루비치가 영화 내에 잠재된 이유도 이러한 고전 영화의 구도와 더불어, 아노라의 삶이 대위법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반의 삶과 어우러진 아노라는 결국 사랑에 대해서 논한다. 결혼 무효를 원하는 이반의 가족들은 곧 아노라를 사기꾼이나 외부인으로 취급한다. 잡힌 이반은 결국 아노라에게 “바보”라는 표현으로 매도한다. 사랑의 경계와 삶의 경계에서 아노라는 무너진다. 기이한 웃음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신분 상승의 신데렐라의 이야기의 경계점에서 인물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화려한 삶의 불분명한 경계점에서 이반이 아노라에게 사랑을 논하는 것은 단 한 번뿐이다. 쾌락이 지나간 자리 이후, 베가스에서 결혼을 해달라는 말과 함께. 관객들에게 웃음 짓게 만드는 코미디는 결코 상황이 우습기 때문은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경계점에서 무너지면서, 붕괴되면서 일어나는 일종의 씁쓸함이 근원지다. 강제로 부딪히게 만든 사회적 역전은 그야말로 망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토로스가 아노라와 이반의 관계에서 “너희들이 사랑하는 줄 알지? 그거 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망상”이라고 일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멈춰버린 인간의 성장을 탓하고 싶어도, 멈춰버린 생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대 사이 이질감의 원인을 살펴보면, 결국 성장의 보류에서부터 일어나는 듯하다. 이반은 멈춰버린 인물이다. 토로스가 아직까지 이반이 아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결혼이라는 행위 자체는 성장의 시발점이 되어주지 않는다. 사회적인 약속 중 하나의 불과한 행위지만, 영화에서 결혼은 성장의 마무리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노라와 이반이 베가스에서 결혼하고, 신혼 생활을 시작할 때 이들의 생활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쾌락에 점철되어 있고, 이반은 게임을 하면서 아노라를 소유하듯 안고 있을 뿐이다. 아노라와 이반의 결혼이 가족들에게 들켰을 때 이반은 도망친다. 현실적 신데렐라 스토리는 이반의 도주에서부터 분기점을 맞이한다. 만약 영화적 허용을 통한 이들의 로맨스를 성공적으로 이뤄낸다면, <귀여운 여인>과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션 베이커는 여기에서 과도할 정도의 현실을 부여한다. 왕자는 연인과 함께 투쟁하지 않고, 순응한다.
이반에게 결혼은 곧 도피처였다. 아노라에게 가진 애정의 범위는 육체적 쾌락이 전부일 뿐, 어떠한 정서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저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반이 도망친 집에서 아노라는 투쟁한다. 자신을 사랑하는지, 오로지 소유만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맞서 싸운다. 러시아어를 배우고,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 애쓴다. 마침내 찾은 이반은 술에 취한 채, 결혼에 대한 언급을 회피할 뿐이다. 아노라가 베가스에서 한 결혼을 물리기 위해 한 싸인은 마침내 관계의 종결을 의미하지만, 이반과 그의 가족들은 사과하지 않는다. “우리 아들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란 말은 어른이 되기 위한 기회를 빼앗은 가족이 하는 상징과도 마찬가지다.
책임에서 회피한 인물은 결국 공허해진다. 짧은 결혼이 끝난 후, 모든 삶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반은 성장할 기회를 놓쳐버렸으며, 신데렐라의 스토리를 추락한 채로 남고 만다. 하지만 이때, 이고르와 아노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다. 분기점은 이반의 성장 기회가 빼앗긴 순간부터다. 오로지 ‘애니’라는 가명으로 자신을 숨기던 아노라는 이고르에 의해서, 자신의 이름인 ‘아노라’를 되찾는다. 마침내 껍질을 전부 벗어던진 아노라는 이고르의 위에서 슬피 운다. 사랑의 결말이자, 성장통을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신데렐라 스토리를 그대로 현실에 가져다 놓은다면, 그 끝은 시원찮을 것이다. 영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빨간색의 밤은 결국 회빛의 눈 내리는 도시의 전경과 부딪힌다. 도시에는 어떠한 쾌락이나, 어떠한 따듯함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흰 빛과 검은빛이 무채색으로 보일 뿐이다. 이반의 집에서 내려다본 강과 도시는 아름다울지언정,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무채색이다. 희고 검고, 악의와 선의도 모호할 뿐이다.
하지만 <아노라>에서 논하는 사랑은 전혀 가볍지 않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듯, 진정한 사랑의 형태는 곧 희생과 투쟁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반의 성장 기회는 빼앗겼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아노라는 생장점의 상징으로 표현될 뿐이다. 마침내 사랑은 공허해졌으며, 결혼은 곧 무의미한 결론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부서지고 깨어진다. 토로스가 젊은 세대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갈하는 장면도 이반과 아노라의 변증법 사이에 숨은 결말일지도 모른다. 고통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쾌락과 화려함을 택하지만, 내부는 텅 빈 채로 남아있다. 성장의 원동력이 될 사랑은 빼앗긴 지 오래다. 마침내 상승과 추락 사이의 경계에서 신데렐라 스토리의 근본은 파괴된다. <아노라>는 그런 이야기이다. 사랑은 성장의 원동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