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도구이자 문화
사진 출처 - Unsplash, Joshua Hoehne
언젠가 영국 작가의 에세이를 한글로 번역한 적이 있다. 당시의 난관은 영국식 유머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였다. 영국의 연예계나 정치계 가십거리가 빈번히 튀어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글이나 AI 틀의 도움 없이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파악된 내용을 한국어로 옮길 때는 문장 개개의 의미와 글 전체의 맥락에 더해,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 작가의 성향까지도 감안해야 했다.
이방의 문화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 내용을 모국어로 옮겨보는 경험을 되살려보니, 그 사이를 매개하는 언어라는 채널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다. 언어는 하나의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일종의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문명의 기원과 맥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저마다의 언어가 지니는 문법적 구조나 체계 저변에서 어떠한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는 탐구의 세계는 아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할 것이다.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의 문학가 다와다 요코 역시도 그러한 언어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작가다. 와세다대학교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함부르크 대학교와 취리히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이력답게, 모국어인 일본어와 외국어인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는 각기 다른 언어의 체계를 작품활동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 넘나듦의 과정에서 쌓아올린 독창적인 사유를 작품의 소재로 삼기 때문이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지난 8월 개역 증보판으로 출간된 『영혼 없는 작가』는 그의 대표작으로,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상과 실험을 거듭한 단편의 글을 한데 모았다. 이번 출간은 지은이가 독일어로 쓴 글들을 독문학자 최윤영 교수가 번역한 것으로, 기존에 절판되었던 초판본의 열네 편에 아홉 편을 더해 총 스물 세 편의 작품을 선정해 원래의 번역본은 다시 다듬고, 새로 소개하는 작품은 새로이 번역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일본어와 독일어 그 어떤 쪽에도 지식이 없지만, 일방적인 감상자의 시선에서도 작가만의 통찰력은 그의 이색적인 경험과 어우러져 충분한 빛을 발했다. 흔히 그의 작품세계는 탈경계, 탈민족 등 다소 무게감 있는 용어들로 묘사되지만, 각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편안한 호흡과 가벼운 문체로 전개되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더해, 그의 글들은 단순한 단상을 담은 에세이나 온전히 창조된 픽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의 입장에서도 글의 형식보다는 본연의 메시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본문 속으로

두 번째로 특별히 눈에 띈 인물은 바로 “es”다. “비가 온다(Es regnet)” “나는 요즘 잘 못 지낸다(Es geht mir nicht gut)” “날이 춥다(Es ist kalt)”라고 말할 때 이 단어로 시작한다. 어학 교재에는 이때 “es”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쓰여 있다. 이 단어는 문법상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없으면 그 문장은 주어가 없는 문장이 되는데, 주어가 없는 문장은 어떤 경우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왜 문장에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단어 “es”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비가 온다고 말하는 순간, Es가 생겨나고 이것이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요즘 잘 지내면 거기에도 이에 기여한 Es가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 단어에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고유한 이름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러나 es는 모든 영역에서 언제나 열심히, 도움을 주면서 문법상의 빈 공간에서 겸손하게 살고 있다.” (pp.47-48, ‘엄마말에서 말엄마로’)
독일어 Es는 영어의 It에 해당하는 비인칭 주어다. 저자는 독일에서 독일인들의 대화 방식을 접하며 인상에 남았던 특징 중 하나로 Es의 사용을 꼽는다. 그리고 Es의 존재 이유를 살피면서 문법적 규정에 반기를 든다. 사실 문법적 설명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표현과 작가가 주장하는 ‘특정한 의미가 없을 뿐이다’라는 표현 사이에 극명한 경계선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Es를 수용하는 자세와 관점, 그 방식에서 비로소 차이가 드러난다.
저자는 Es뿐만 아니라 모든 문장의 구성요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그 용례나 의미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언어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Es는 그저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지만, 약간 시야를 달리해 보면 Es는 자신이 아닌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나아가 Es는 자신이 위치하는 그 문장의 의미에 따라 유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달리해 가며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고, 누군가를 ‘잘 지내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내 감정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어에도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p.83, '통조림 속의 낯선 것')
이방인으로서 다른 언어를 마주할 때는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각으로 인해 익숙하지 않은 언어 체계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저자 또한 일본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끝에, 그는 모어인 일본어마저도 자신의 모든 내면을 합리적으로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동시에 어떠한 표현을 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떠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자세에서 일종의 폭력성을 발견한다.
앞에서 발췌한 Es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자세, 곧 일상적이고 당연한 언어의 구성 요소들을 다각도로 의심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사실 문학가, 나아가 예술가의 근본적 어법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을 힘껏 누리고 마음껏 의심한다. 이미 많은 것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전에 없던 존재들을 싹트게끔 하는 창조적인 생각은 바로 여기에서 온다.
글자들은 어쩌면 자신이 어떤 나라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독일에서는 이것을 의미하고 프랑스에서는 저것을 의미한다는 것 말이다. 그들은 여행자고 여행하는 도중에 어느 언어에서 숙박하는지에 따라 매번 다른 의미로 이해된다.
나는 프랑스어 텍스트를 다시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눈에 띄는 단어들이 여럿 더 있다. “horizontale”과 “immobiles”다. 나는 두 단어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짧은 단어에서는 외적인 유사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긴 단어들이 서로 닮은 경우는 우연인 경우가 드물다. 즉 단어가 길면 길수록 그들 의미의 유사성은 더 외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내가 알기로 나는 곧 이 텍스트의 초벌 번역을 받게 될 것이다. 며칠 동안이지만 읽을 수 없는 원본과 같이 살았다는 것이 기쁘다. (후략) (pp.217-219, '글자들의 음악')
‘글자들의 음악’에서 저자는 프랑스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접하고 느꼈던 단상을 펼쳐보인다. 라틴어에서 영향을 받은 독일어와 프랑스어 사이에는 적지 않은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비슷한 알파벳을 사용하고, 단어의 외양 역시도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를 섞어서 사용하는 일본어와 비교했을 때, 비슷한 모습의 알파벳이 통용되는 서양권의 문자 체계는 더욱이 흡사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도 명시적으로 유추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저자에게는 낯선 자극을 선사한다.
일례로 그 어떤 차이도 없이 완전히 똑같은 ‘du’라는 단어가 독일어로는 ‘너’라는 2인칭 주어로서의 절대적 위계를 지니는 데 비해, 프랑스어에서는 ‘약간의’, ‘얼마간의’ 등의 의미를 지닌 부분관사로 사용된다. 이 짧은 단어의 의미는 함부로 유추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긴 단어가 서로 닮은 경우에는 의미상의 유사성이 짙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그는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를 즐거이 탐구한다.
- 너 내가 지금 말해주는 독일어 문장을 외울 수 있겠니. 내가 새가 자식들 먹이를 주듯 문장들을 덩어리로 잘게 잘라서 먹을 수 있게 반쯤 씹어서 줄게.
- 문장들이 내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문장들을 기억하지? 의미 없는 소리가 계속되면 나에게는 숲속의 쉬쉬 소리나 찌찌 소리로밖에 안 들릴 텐데.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글로 써줄까?
- 발음기호는 겸손해 보이지. 너무나 겸손하기 때문에 기호는 금방 잊혀.
- 그럼 한자로 써 줄까? 너는 이야기도 아닌데 한자만 죽 나열되어 있어도 기억할 수 있겠니?
- 내 생각에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 그러면 문장들을 한자로 써줄게.
- 그런데 독일어를 어떻게 한자로 써?
- 내가 “蓮”를 쓸 테니 발음해봐.
- 하스.
- 그래 “하스”는 독일어로 혐오한다는 뜻이지만 너는 알 필요는 없어. 너는 그 “연꽃”을 뜻하는 그 한자만 기억하면 되고 일본어로 발음하면 돼. 그러면 너는 혀로 연꽃을 느낄 거야, 듣는 사람의 귀에는 “하스”가 들어가고. (pp.228-231, '심부름꾼')
마지막으로 저자의 독창성이 잘 담겨진 단편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미카’와 ‘가야코’라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로, 뮌헨의 쉰덴 교수님 밑에서 악보 공부를 했던 미카는 공부를 포기하고 교토로 돌아온 지 오래다. 그 이유를 물었던 교수님에게 대답을 전하고 싶지만 노쇠한 교수님은 눈과 귀가 어두워져 통화로는 대화할 수 없고, 편지를 보내더라도 아내가 대신 읽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교수님 외의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미카에게 가야코는 의외의 전달책이 된다.
다음 달에 뮌헨에 방문할 예정인 가야코는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미카는 가야코에게 자신의 답신을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한자어를 사용해 전달해 주기 시작한다. 가야코가 이해하고 내뱉는 단어들은 쉰덴 교수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의 독일어로 들릴 것이다. 그렇게 나열된 문장들은 책 본문에 한국어 음차와 독일어 원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그 독일어 원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역자의 설명이 덧붙여진다. “*미카가 가야코에게 써서 건네준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으며, 해석이 가능한 완전한 문장들이 아니다. 작가는 본문의 독일어를 소리 내어 읽으며 그 소리 속에 있는 일본어를 추측하도록 이끌고 있다.” 완전한 의미의 독일어 원문과 한글 번역본이 실리지 않은 이유는 아마 저자의 의도를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의도라 함은 바로 쉰덴 교수님의 사고의 흐름을 독자 또한 동일하게 경험하게끔 인도하는 것이다. 그 순서는 일본어의 발음에서 독일어의 의미를 유추하는 쉰덴 교수님의 방식과는 완전히 역순으로 흘러간다. 즉 독일어의 발음에서 일본어의 의미를 짐작하는 방식으로 전복된다.
책에 실린 독일어 원문을 읊으면 특정한 일본어의 단어가 연상되고, 그 과정 끝에 원문과는 또 다른 새로운 의미가 재생산된다. 독일어 원문을 한국어로 구태여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이 방식으로는 일본어의 발음과 독일어의 발음을 이용해 원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게끔 만드는 저자의 의도를 전달할 수 없기에, 옮긴이 역시도 그 역할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물론 독일어와 일본어를 전부 구사하는 독자들에 한해서만 그 경험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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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영혼 없는 작가’라는 표현은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고향과 이방을 넘나들며 다양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에도 새로움을 부여하는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의 영혼이 특정한 어딘가에 구속된 상태로는 불가하다. 저자의 문장들은 한정된 땅 혹은 특정한 언어적 맥락 안에만 갇혀 있는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움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거듭 일깨운다.
새로움을 향한 갈구, 편협함을 향한 경계심으로 무장한 채 이색적인 삶의 경험을 관찰한 결과물이다. 그 끝에 구축된 그의 작품세계는 독일 문학이나 일본 문학, 그 어떤 범주로도 일반화하기 어려운 이종의 장르로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그 낯설고 뜻깊은 여정에 간접적으로 동행할 수 있다는 데에 의미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