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호기심과 욕심이었다. 뮤지컬에는 넘버와 대사가 있고, 연극에도 대사가 있고, 오페라에는 대사와 음악이 있듯 공연 예술은 사람의 ‘말’로써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용 공연에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몸짓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에 나는 식견이 좁은 사람이었다. < TRANS Ⅲ: 주어 없는 움직임 >을 보게 된 것은 말 없는 공연이 작품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는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 반, 그런 예술까지 시야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심 반이 이유였다.

8월 5일과 6일, 이틀간 공연한 < TRANS Ⅲ: 주어 없는 움직임 >은 청년 안무 퍼포머 오현택과 사운드 퍼포머 오명석이 만나 제작한 무용 공연이다.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 무용 공연은 공연자가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나와 우아하게 손을 뻗거나 감정을 한껏 담은 표정을 연출해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공연에서는 달랐다. 표정은 없고,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공연장에 입장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마네킹 같은 것과 여러 개의 밧줄이 전부였다. 이날의 공연은 나에게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공연 속 이야기
공연은 4장으로 이루어졌다. 사운드만 맴도는 1장과 신체의 움직임만을 보여주는 2장, 이후 3장과 4장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했다.
1장부터 4장까지의 구성은 한 이야기의 서사처럼 유기적으로 흘러간다. 신체의 이야기 같았다고 할까. 줄과 조화를 이뤄가보려 했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아차린 신체의 몸부림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1장은 소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2장에서 무대 위에 놓여 있던 것이 움직이며 시작했다. 그것은 마네킹이 아니었던 것이다!(퍼포머들은 그것을 ‘신체’라고 정의한다.) 안무 퍼포머 오현택이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곳에서 그는 오현택이 아니다. 신체는 무대에 놓인 밧줄이라는 직선을 따라 움직였다. 일어섰다가 엎드려 눕고, 또다시 일어났다. 그것의 움직임은 밧줄의 반듯함과 정교함을 모방하며, 그 또한 밧줄과 동일해지고자 함을 보여줬다.
신체는 천장에 매달린 밧줄을 타고 올라가거나 그것을 붙잡고 무대 모서리를 따라 걸었다. 신체와 밧줄은 상호작용했다. 그 순간은 신체가 밧줄에 의해 움직인 걸까, 밧줄이 신체에 의해 움직인 걸까. 신체와 밧줄이 보여 준 상호작용은 조화롭기보다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관객은 밧줄과 신체, 구조와 개별성의 균열을 긴장감으로써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된다.
3장과 4장은 1장과 2장 동안 견고하게 자리하던 밧줄의 형태를 깸으로써 관객을 몰입시켰다. 소설로 따지면 3장은 위기, 4장은 절정과 결말에 해당한다. 3장에서 신체는 직선의 밧줄을 자기 마음대로 구부려 세우기 시작했다. 구부러진 밧줄을 따라 신체도 구부렸다. 2장에서 마주한 불안정함은 어디 가고 신체는 신이 난 듯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제야 그것이 생동감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4장에서는 신체가 무대 위에 흐트러져 있는 밧줄을 어깨에 들어 매고 한 곳으로 모았다. 신체와 밧줄은 뒤엉키고 교차됐다. 신체의 움직임이 어쩐지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신체는 한 곳에 모은 밧줄 위로 몸을 말아 누웠다. 잠시후 신체는 오현택으로 돌아와 인사했다.
공연 밖 이야기
< TRANS Ⅲ: 주어 없는 움직임 >은 ‘개별의 차이를 지워내는 사회 구조 속에서 개별성과 동일성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과 저항을 물리적으로 탐색하는 퍼포먼스’다. 개별성 보존에 대한 열망은 다름 아닌 신체의 움직임으로 구현된다. 제도와 질서, 곧 동일성을 상징하는 밧줄이 종국에 신체에 의해 헤집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체는 자신의 개별성을 지우는 밧줄에 그저 굴복하지 않는다. 순응하기도 하지만, 반항하고 흔들고 때로는 보다 거칠게 저항한다.
신체, 밧줄, 사운드 중 밧줄의 상징은 가슴 깊게 와 닿는다. 퍼포머는 밧줄이 가진 이중성에 주목했다. 밧줄은 개별성을 가진 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단단히 이어주지만, 동시에 얽어맨다는 이중성을 가졌다. 사물과 사물을 밧줄로 묶는 것과 밧줄을 신체에 묶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신체가 밧줄에 묶이려면 반드시 ‘묶는 주체’가 필요하다. 주체는 신체지만 그것에 묶이고 뒤엉키고 나면 신체는 밧줄에게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오현택은 이러한 점에 주목해 ‘작동하는 타자’에 대해 역설했다. 관객은 무생물에 불과했던 밧줄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점은 2장에서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신체로 인해 밧줄이 움직이는 것인지, 밧줄로 인해 신체가 움직이는 것인지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신체, 밧줄, 사운드만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공연에는 오현택이 직접 겪은 일에 대한 깊은 탐구가 담겨 있다. 오현택은 올해 초 ‘국립예술단체 통합 논의’가 진행된 것을 보며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예술이 통합된다는 발상은, 결국 각자의 역사와 리듬, 언어와 조건이 너무 쉽게 하나의 표준으로 해석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개별이 동일화될 때, 무엇이 사라지는가’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 고민을 감각과 움직임으로 드러낸 것
4장 끝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덩어리는 구조의 주체에게는 암시, 우리에게는 숙제가 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예술가들에게는 ‘응어리’라는 이름으로 불릴지 모르겠다.
마네킹과 유사하게 변신한 신체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성별과 이름이 모두 제거된 그는 누구도 아니면서 누구나 될 수 있다. 공연 제목에 ‘주어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퍼포머는 “예술 현장에 관심을 가져달라”거나 “우리의 일에 공감해달라”고 말한 적 없으며, 무엇인가를 촉구한 적 없지만 이미 그 구조 위에 내가 서 있는 듯 신체의 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1장에서는 정교하고 딱딱한 소리가 3장에 들어서는 불규칙하고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존재를 되찾아가려고 하는 신체에게 힘을 실어주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 불규칙한 소리가 줄을 움직이고 신체가 움직이며 나는 소리와는 잘 어우러지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소리도 결국은 무엇인가와 상호작용해야 울림이 생기는 것이고, 오명석은 정적 안에서 그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번 공연으로써 몸의 움직임으로도 수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다. 최근 몇 가지 예술 공연을 보러 다녔다. 작품의 의미도, 표현 방식도 모두 달랐다. 다시 말하면 모두 그만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개별성과 고유성이 인정될 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독창성과 창의성, 고유성을 강조하면서도 독자성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 안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에게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