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와 판단력을 가늠하고는 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삶을 대하는 능력이 보다 능숙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순간의 고민과 감정은 누구에게나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인간은 배우고 느낄 점이 있으며, 진지하게 삶을 마주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등하다.
그러나 유독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만큼은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보호와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서 선택의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영화 ‘수연과 선율’은 ‘아이가 보호자를 찾는다’는 한 줄에서 시작되어, 아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숙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예리하다. 그에 반해 어른들은 나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비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가족을 잃고 홀로 세상에 던져진 수연을 기다리는 세상은 더욱 잔혹하다.
어른들은 수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를 꺼려하고 친구들은 외면한다.
교회 오빠는 몰래 성추행을 하고 무리와 함께 수연이 혼자 지내는 집으로 찾아온다. 현장에 온 그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부터 감싸고 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공동체가 되기를 거부당한 수연은 고립감을 느낀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공동체만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수연과 선율이 보육원에 가고 싶지 않아라 했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테다.
수연과 선율에게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최소한의 의식주와 안전을 보장해줄 생존의 수단이다. 수연은 새로운 가족을 찾기 위해 선율이 입양된 가정에 다가간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선율의 가정은 감춰진 비밀이 있다. 선율은 엄마의 기쁨을 위해 언어 장애가 있는 척 연기한다.
수연도 다르지 않다. 그 집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달콤해 보이는 복숭아의 속살은 썩어있다.
가족을 잃은 아이들은 절대적 약자다. 어른들은 그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품어주는 척하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욕심만으로 좌지우지한다. 결국 수연과 선율은 어른들의 무책임 아래 또다시 버려진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가족은 생존의 수단이 아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마주하는 친밀한 관계.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함께 손을 잡고 위기를 헤쳐갈 수 있는 관계. 수연과 선율은 손을 마주 잡는다. 선율은 이대로 언니랑 살고 싶다며 물방울에 숨어 있자고 말한다.
아이들의 순수한 말이 마음을 울린다.
그렇지만 수연과 선율은 함께하지 못한다. 거짓말처럼 수연의 친할아버지가 나타나 보육원을 가지 않게 되지만, 선율은 파양되어 보육원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힘이 없다.
‘수연과 선율’은 어른들이 얼마나 아이들의 세계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폭력적으로 무너뜨려 왔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도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어른들은 이제까지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세계를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