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의 공간은 철저히 이성적 규칙으로 설계되어 있다. 외형으로는 방송국의 복도, 화장실의 타일들은 직선과 대칭으로 이뤄져 있으며, 서사 내부의 규칙들, 서브스턴스의 복용 방식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구조 또한 이성의 규격 내에 존재한다. 이와 같은 질서들은 단순한 배경만이 아니라, 통제와 균질성을 강제하는 은유이다. 감정을 억압하는 규칙이 한계를 드러낼 때, 자아가 내부에서 붕괴되는 과정은 시각화된다. 나아가 만들어진 괴물은 외부의 침입자가 아닌 시스템 내부에서 태어난 규칙의 파열로 나타난다.
![[꾸미기]eeenews-p.v1.20241211.10f7e4c2af4743f7a7c41e1d821e3ce9_P1[크기변환].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28183816_ipbkvmmw.jpg)
엘리자베스는 한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있었으며,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명예의 거리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남성 구조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구조 속에서 그녀의 가치는 소모되었으며, 과거의 영광뿐이다. 강렬한 색채와 직선이 어우러진 방송국의 복도에서 엘리자베스는 방송국 사장에게 해고 통보를 받는다. 떨어지는 가치 속에서 그녀의 선택지는 명확하다. 산업의 규율을 거부하고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기존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지워내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쌓아온 위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서브스턴스>에서 이와 같은 퇴출은 단순한 배제가 아니다. 내부에서 외부로 밀려나는 과정은 저항을 수반하며, 작품 내의 ‘서브스턴스’ 라는 약물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은 체제 바깥에서 도래한 위협이 아니다. 집단 내부에서 생성된 괴물성의 징후이며, 내부에 재진입하기 위한 괴물의 탄생 과정이다.
엘리자베스는 직선으로 정렬된 타일 위에서, 젊음을 되찾기 위해 서브스턴스를 주사한다. 규칙에 따라 약물을 투여하자, 엘리자베스는 ‘수’라는 새로운 육체로 재탄생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체제를 거부하는 게 아닌, 다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통제 속으로 진입한다. 수가 태어났을 때, 엘리자베스와 수는 두 개의 육체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자아를 공유한다. 기존의 육체가 초반부에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아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수는 괴물처럼 보이지만, 그 괴물성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수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분열이 은폐된 채 체재 내부에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만든 조롱의 복제물이자, 체제 안에서 새로이 환영받는다. 방송국 사장은 수를 다른 태도로 대하고, 거리의 빌보드는 그녀의 젊은 육체를 전시한다. 수는 내부를 파열시키는 도구이자, 기원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는 괴물이다.
작품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탈출구는 분명하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프레드는 그녀가 속한 집단의 외부에 있는 인물이다. 엘리자베스의 동창이자 평범하고 무해한 존재로 묘사된다. 왜곡되지도 않고, 특이하지도 않으며, 그녀가 서 있는 산업 구조 바깥에 서 있는 인물이다. 다만 경계선 위에 선 엘리자베스에게 체제 바깥은 선택지가 아니다. 해고된 직후, 그녀가 마주하는 방송국 복도는 규칙적인 직선이자 강렬한 색채로 이뤄져 있지만, 끝에 놓인 외부는 텅 빈 공허일 뿐이다. 프레드와 약속에 나가지 않는 이유도 외부가 의미하는 것이 해방이 아닌, 상실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장을 지우면서 거울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는 깨닫는다. 외부로 밀려나는 일은 자신이 쌓아온 모든 위치와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며, 그 순간부터 자신은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된다.
![[꾸미기]eee20250206_gmYeBD[크기변환].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28183826_qcghroyv.jpg)
볼프강 카이저가 말하듯, 그로테스크란 친숙한 질서가 돌연 낯설게 느껴지게 만드는 감각의 전환이다. 신체의 분리가 하나의 자아를 담보하지 않듯, 작품 속 규칙이 무너질 때 정신을 서서히 파열된다. 엘리자베스의 욕망이 만들어낸 수는 아름다움을 앞세워 집단의 내부로 침투한다. 하지만 두 개의 육체를 공유하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수는 엘리자베스의 삶을 충실히 재현한다. 그녀가 맡았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손키스도 그대로 재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가 살아가는 세계는 엘리자베스의 세계와 다른 이질감을 돌출시킨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흐려지는 세계 속에서, 마침내 엘리자베스는 자아를 분리한다. 이 분리는 단지 정체성의 혼란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파열의 실천은 익숙했던 세계를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라고 여기지 못하게 만든다. 은폐되어 있던 그로테스크가 드러나자, 생경한 세계를 이끄는 형상으로 발현된다.
작품 내에서 끝없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문장이었다. 이 규칙은 자아의 균열을 막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괴물성을 억제하는 통제적 장치였다. 신체는 이성을 담보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본능의 영역에도 속해있다. 서브스턴스의 복용 규칙을 어기기 시작한 본체는 파괴되고, 억눌려 있던 괴물이 본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통제하던 자아는 분열되고, 억눌려 있던 괴물이 본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수는 이제 내부에 완전히 속한 인물이 되었고, 엘리자베스는 속했던 체제에서 괴물로 반전된다. 서브스턴스를 과용한 엘리자베스의 육체는 빠르게 노화하였고, 수에게 찾을 수 있는 외면적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나아가 엘리자베스의 투쟁을 끝낸 수는 하나의 자아를 가진 듯 보이지만, 아름다움을 위해서 서브스턴스를 복용하여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예정된 파열을 지탱하는 규칙은 수의 새로운 육체를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다. 엘리자베스를 파괴하고 나타난 생경해진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세계는 태어날 수 없다. 오직 하나라는 걸 잊지 말라는 메시지는 객체를 넘어서, 세계에도 적용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의 외형적 충격에 머무르지 않고, 이성의 규칙과 산업적 통제 속에서 파괴되는 ‘하나뿐이어야 하는 자아’의 신화를 조롱한다. 통제적인 신체, 분리되지 않는 정체성, 하나의 얼굴만을 허용하는 시스템 속에서 괴물은 내부의 가장 말단까지 침투한다. 그 결과, 괴물이란 결국 외부에서 온 이질적 존재가 아니라, 동일성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억압된 자아의 역류로 드러난다. 엘리자베스의 괴물화는 오히려 가장 이성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이다. 그리고 그 필연을 비틀어 파괴하는 존재가 수라면, <서브스턴스>는 괴물을 추방하는 대신, 그 괴물이 누구였는지를 끝내 되묻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