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장난감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문구가 몇 개 있다. 우리 아이 창의성 발달, 지능 발달, 감성 발달.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문제집에는 '창의력 문제'라고 해서 다른 문제에 비해 난이도가 있는 문제가 있기도 했다. 창의성은 사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 의식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겠다. 우리 시대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누군가의 창의성의 발현일 터. 그렇다면 창의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중요한 가치가 되어 왔는가.

잠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서, '창의성 발달'이라는 말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한 가지 논란거리가 하나 있다. 창의성은 학습될 수 있는가.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고, 창의성도 타고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창의성은 교육에 따라 발달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근거도 없지만 나는 그것이 천재적으로 타고난 것의 영향이 크지만 어느 나이까지는 교육과 환경에 따라 발달되지만, 어떤 시기에 이르면 더 발달되지 않고 길러낸 창의성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여러 사람의 창의성과 현실의 한계가 맞닿아 세상에 있는 것들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어릴 때 하는 경험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한다.
결국 이런 질문은 창의성이 꽤 모호한 개념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창의성은 때로는 배울 수 있는 기술로, 때로는 타고난 성격적 특성으로 간주된다. 어떤 경우에는 예술이나 디자인과 마케팅 같은 비지니스의 '창의적' 측면을 지칭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확장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창의성을 믿는다. 창의성은 유쾌하면서도 도움을 줄 수 있고, 특별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그 진보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창의성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런 비판 없이 신비에 가까운 힘을 창의성이라는 숭배의 대상에 부여하면서 우리의 모든 욕망과 불안을 그 대상에 투영한다. 지금 같은 분열의 시대에 창의성에 대해 창의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거의 없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이 책은 우리가 창의성을 믿게 된 과정, 즉 창의성을 거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생각하게 된 과정과 무엇보다도 창의성이라는 현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은 창의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더 창의적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책이 아니다. 또한 이 책은 예술과 발명 같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탐구하는 책도 아니다. (...) 이 책은 창의성이 어떻게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하나의 실체가 되었는지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성이라고 하면 숯하게 그 단어가 들려오는 것과 모순되게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만, 그것은 나에게는 없고 뉴스 문화면에 올라가는 이름의 주인공들에게나 있을 것 같다. 혹은 르네상스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 발전에 기여를 한 이들. 하지만 의외로 창의성은 사소하기도 한데, 우리가 써내는 글이나 짓는 노래, 그리는 그림도 많은 창의성을 담고 있다. 창의성은 기존의 것에서의 탈피, 해방 같은 것 아닐지 생각도 든다.
한편 이러한 창의성에 대해서도 견해가 나뉘었다.
이것은 당시 다른 연구자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었다. 길퍼드나 테일러 같은 심리측정학자들이 창의성을 주로 지적 능력으로 보았다면, 로저스는 창의성을 인간 본성이 완전히 꽃피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는 그가 정신분석학자로서 개인이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끼도록 돕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저스는 사람들을 분류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과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창의성은 수동적이고, 획일적이라는 안전한 틀에 안주해 있는 산업사회에는 위험한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럼에도 로저스의 관점은 '곧 창의성 연구 문헌과 인본주의 심리학으로 알려진 독특한 학파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프랭크 배런은 이렇게 거의 반사회적인 개념, 즉 창의적인 비순응주의자라는 개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원초적이고, 세련되지 않으며, 순수하고, 마법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을 외면하라는 사회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는 공동체의 '문명화된'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거부한다. 창의적인 개인들은 자신을 온전히 소유하기를 원하고, 사회가 모든 구성원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규범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근시안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거부한다.
이렇듯 역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창의적이라는 것은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많은 전후 사상가에 따르면, 그 사회 자체가 아마도 비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창의적인 사람은 매우 생산적이고 유용한, 심지어 특히 전문적 맥락에서조차 그러한 존재를 의미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두고 이상하다, 유별나다 같은 말을 한다. 안 좋게 들릴 수 있지만 긍정적으로 바꾸면 독특하다 그리고 창의적이다, 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 그들의 다름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지만, 그 비주류는 하나의 유행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는 걸 생각하면 창의성이라는 게 참으로 흥미롭게 다가온다. 유행하는 음식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이미 있는 음식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틀을 깨고 새로운 것이 탄생하면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하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잠시 유행하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끝없이 개발되어 스테디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규범적이지는 않지만 (불합리한 것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것에 망치가 되는 것이 생산적이고 유용해질 수 있다는 것이 창의성의 놀라운 효과라고 생각한다.
이 글 초반에 제시했던 이야기를 하나 돌이켜보겠다. 창의성의 학습에 대한 것과 짧은 나의 견해 말이다.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책에도 그에 대한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토런스는 학교가 창의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과학적 연구로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초기 테스트 결과에서 이런 확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일부 발견했다. 바로 4학년 때 창의력 테스트 점수가 갑자기 하락하는 '4학년 슬럼프' 현상이 그것이었다. 교육심리학자들은 이미 아이들이 4학년 즈음에 사회적 관습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규칙에 더 신경을 쓰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자유로운 놀이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자연스로운 과정으로 여겨졌지만, 토란스는 이 현상에 어두운 면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과도한 억압은 '미래에 학교 중퇴, 비해행, 정신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 가지는 당시 미국 청소년들을 관찰하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문제들이었다. (...)
이 결과에 기초해 토런스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은 상상력의 상실은 단순히 '인간 발달의 불가피하고 건강한 일부'가 아니며, '창의성'을 희생하지 않고도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발달'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토런스는 미국 교육 창의성 증진에 앞장섰다. 예술교육, 열린 형태의 과제, 창의적 사고 훈련 등을 장려하였으며, 교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을 개발하고 알렸다.
한편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창의성 연구 분야에서는 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창의성 능력이 선천적이고 고정적'이라고 가정하는 이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창의성의 자극과 개발에 힘쓰는 이들이었는데, 토런스는 이들 사이에서 '창의성은 타고나는 능력이지만 적절히 개발되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이 있는 존재'였다. 또한 '창의성을 측정하고 개발하는 작업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과정의 일부'라고 여겼다고 한다.
고급 과학 인재에 관심을 두었던 캘빈 테일러는 1964년에, 창의성의 교육 가능성이 여전히 의문시되었음에도, 심리학자들이 이제 적어도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창의력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모든 연령, 모든 문화, 모든 인간 활동 분야에 걸쳐 나타난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토런스는 당시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으며, 아이들과 부모들 사이에서는 영웅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는 토런스의 주장과 노력은 미국 교육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하는 데 큰 영행을 미쳤고, '창의성' 자체는 미국 교육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보며 '창의적이다'라는 생각을 해 왔는가를 돌이켜보았다. 대부분 나와는 다른 사고를 하는 것,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놓고 보면 창의성이 드러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세계를 현실에 구애 받지 않고 마음껏 펼쳤을 때 드러나는 듯 하다. 창의성이라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창의적인 걸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과 발전할대로 발전해버린 세상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세상에 이미 있을 건 다 있고, 있는 것들을 변형시키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는 거라고. 예술도 그럴 것이라고.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완전히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의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고민이나 불편한 것, 내지는 스스로가 보기에 변화를 주고 싶은 것에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창의성의 역사를 알게 되고, 창의성이라는 게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인문적인 동시에 과학적인 책인 탓에 어렵기도 했지만 우리가 가지는 창의성, 나아가서는 AI와는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창의성을 잠시 생각해보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