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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그녀에게 함께 번지점프를 하자고 제안한다. 위험할 땐 옆 사람에게 기대는 심리를 노린 것이다.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극한 상황은 극도의 흥분 상태를 유발한다. 강렬한 신체 반응을 느끼면 뇌가 그 반응을 옆 사람에 대한 호감으로 오인시킨다. 즉, 무서워서 두근대는 걸 옆 사람 때문에 두근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 그와 함께 몸이 묶여 번지점프를 한 그녀는 설렘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을 얻었단 승리감에 도취한 그에게 그녀는 말한다. 교관이 너무 멋있다고. 그녀는 번지점프 교관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다.


2025년 6월 10일에 개막해 8월 31일에 막을 내리는 연극 <디 이펙트>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사랑에 빠지는 건 호르몬 때문이란 이론을 뒷받침하는 일화다. 사랑을 하면 뇌의 보상 회로가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며 도파민이 분비된다. 사랑하는 이를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며, 그 사람을 열망하게 되는 건 이처럼 뇌의 활동 때문이다. 코카인 등 중독성 약물을 할 때도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된다. 즉 사랑은 끊기 힘든 정서적 중독인 것이다.


연극 <디 이펙트>는 감정의 본질은 어디에서 오는지 치열하게 다투는 심리극이다. 뇌와 호르몬의 장난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게 사랑인지, 자발적인 의지와 선택에서부터 비롯되는 진실한 마음이 사랑인지. 극은 항우울제 임상 테스트에 참여한 지원자 코니·트리스탄, 테스트를 진행하고 관리하는 의사 로나·토비를 통해 인간 감정의 기원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디 이펙트> 한국 초연엔 드라마·영화에서 활발히 연기하는 배우들이 다수 출연한다. 극은 코니와 트리스탄이 약을 먹는 장면, 두 사람이 심리 테스트를 하는 장면, 두 사람의 뇌 사진을 로나와 토비가 분석하는 장면에서 무대 스크린 영상과 그래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현대적인 감각의 무대와 조명 연출 또한 세련됐다. 암전이 잦은 것과 1막 엔딩에서 흐르는 긴 나레이션들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작품은 관객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했으며, 극장 어셔들도 의사 가운을 착용해 극 외적으로도 재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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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초연 연극인 <디 이펙트>는 영국 극작가 루시 프레블이 집필했다. 2012년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은 같은 해 비평가협회상 최우수 신작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 그 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며 호평받은 작품은 2025년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극은 원작자 허락을 받고 프로덕션 중 세계 최초로 ‘젠더 벤딩(gender bending : 성별 구분이 없는 차림, 혹은 행동)’ 캐스팅을 해 화제가 됐다.


국내 공연계에서 ‘젠더 프리(gender free)’ 캐스팅은 활발히 시도되는 추세다. 젠더 프리 캐스팅은 성별에 상관없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걸 말한다. 이는 여성 배우들의 커리어 확장 및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 캐릭터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의 여러 개념으로는 젠더 블라인드·젠더 벤딩·젠더 크로스가 있다.


젠더 블라인드(gender blind)는 배역을 연기할 능력을 최우선에 두고, 성별은 배제한 채 캐스팅하는 것이다. 연극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를 여성 배우 차지연이 연기한 것이 대표 사례다. 젠더 크로스(gender cross)는 배역과 다른 성별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을 뜻한다. 원작에서 여성인 ‘트런치불’을 무대에선 남성 배우가 연기한 뮤지컬 <마틸다>가 이에 속한다.


국내 초연 연극 <디 이펙트>에서 시도한 젠더 벤딩(gender bending)은 배우의 성별에 맞게 배역을 맞추는, 즉 대본 각색까지 더해지는 걸 뜻한다. 국내에선 여성 배우 이봉련이 햄릿을 연기한 국립극단의 <햄릿>을 예로 들 수 있다. 극은 햄릿뿐 아니라 오필리어를 남성으로, 호레이쇼를 여성으로 두고 대본 또한 바뀐 설정에 맞게 각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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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이펙트>의 임상 실험 지원자 ‘코니’는 우울증을 앓았던 심리학 전공 대학생이다. 애인의 가정을 깼단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는 다른 지원자 ‘트리스탄’이 다가오는 걸 거부한다. 죄책감·폐쇄적·우울·자기 부정 등으로 요약되는 코니는 원작에선 여성이다. 하지만 한국 프로덕션에선 남성 배우 박정복과 여성 배우인 옥자연, 김주연이 함께 연기한다. 자유로움·개방적·감정적·폭발적 등으로 요약되는 트리스탄은 원작에선 남성이지만, 국내에선 여성 배우인 이설과 남성 배우 오승훈, 류경수가 캐스팅됐다.


실험 진행자, 책임자인 두 정신과 의사 ‘로나’와 ‘토비’ 또한 젠더 벤딩 캐스팅이 됐다. 로나는 의사면서도 우울증 환자이며, 가정이 있는 토비와의 연애가 끝난 후 정신적으로 무너진 여성이다. 로나 또한 여성 배우인 이상희와 이윤지, 남성 배우 김영민이 캐스팅됐다. 유능한 의사이자 학자이지만 사생활은 깔끔하지 않고, 임상 테스트 또한 뒤에서 통제하는 토비는 원작에선 남성이다. 국내에선 여성 배우 양소민과 남성 배우 박훈, 민진웅이 출연한다.


원작에선 여성인 코니와 로나는 우울하고, 옳지 않은 연애로 인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남성인 트리스탄과 토비는 연애에 거리낌이 없으며, 적극적이고, 머리를 쓸 줄 아는 캐릭터다. <디 이펙트> 민새롬 연출은 ‘그동안은 예민한 인물들을 관습적으로 여성에 많이 부여하고, 개방적이고 자유 의지가 높은 인물들 또한 남성으로 많이 그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 역할이 바뀌어도 이와 같은 특성들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원작자도 한국 프로덕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젠더 벤딩 캐스팅의 이유를 밝혔다.


코니와 트리스탄은 5주간의 항우울제 임상 테스트 기간에 사랑에 빠진다. 다가오는 트리스탄을 거부하면서도 코니는 그에게 끌린다. 트리스탄이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약 때문인지, ‘진짜’ 감정인 건지 두려워하는 코니. 이미 40대 교수의 연인인 코니는 애인의 가정을 깨고 그를 만났다. 테스트에 참여하는 시점엔 교수와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그는 죄책감에 오랫동안 짓눌린 상태다. 그래서 그는 트리스탄에게 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한동안 자신을 속인다.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인 트리스탄은 돈을 벌기 위해 전에도 여러 번 임상 테스트에 참여했다. 그는 건강 상태를 묻는 로나에게 병을 앓은 적도 없고, 깨끗하다고 자신만만해한다. 트리스탄은 규칙을 어기고 몰래 핸드폰을 들여오는 법도 잘 안다. 그는 핸드폰을 반입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에 발작했던 사실도 감추고 테스트에 참여했다. 이는 후반에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트리스탄이 솔직했던 건 코니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던 순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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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 또한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약을 먹지 않는다. 겉으론 멀쩡할지라도 속은 망가진 자신을 속이고 정신과 의사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다. 과거에 로나를 무너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토비는 이번에도 그를 속인다.


임상 테스트에선 흔히 지원자들에게 무작위로 가짜 약을 섞어서 준다. 로나는 트리스탄이 가짜 약을 먹는다고 알고 있다. 트리스탄의 감정이 진짠지 괴로워하는 코니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트리스탄이 먹는 약은 포장지만 가짜였고, 내용물은 진짜였다. 의사이자 테스트 진행자인 로나 또한 코니와 트리스탄처럼 모니터링 대상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순간을 모면하려고, 혹은 타인을 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거짓말은 나비효과가 돼 큰 결과를 낳는다. 서로에게 미친 듯이 이끌리다 감정의 한계까지 폭발하는 코니와 트리스탄. 그들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0’, 즉 아무것도 없던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터질 것 같던 극한의 감정들이 실제로 터지고 마음이 차분해지자, 코니는 자신이 트리스탄을 진짜로 사랑한단 걸 깨닫는다. 다치고, 상처받고, 파열하는 위기를 지나고 나서야 마음에 확신이 생긴 코니. 약을 먹을 때의 자극적인 설렘과 흔들림보다 훨씬 강력한 진짜 감정은, 약을 끊은 후에 더 단단하게 자리 잡는다.


약을 거부하던 로나 또한 토비가 권유하는 우울증약을 복용하기 시작한다. 코니와 로나 모두 우울했고, 잘못된 연애를 했으며, 죄책감에 빠졌고, 자기 자신을 속였다. 그들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감정을, 현실을 인정하며 마음을 돌본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단 걸 보여주는 결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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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슬픈 게 두려워. 나 때문일까 봐. 네가 행복한 것도 두려워. 나 때문이 아닐까 봐.”


사랑은 미친 짓이라 한다. 극 중에서 트리스탄이 극도로 감정적인 성격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 또한 웃음을 유발하고 분위기를 환기하려 넣었겠다고 예상되는 대사가 있다. 트리스탄은 속이 울렁거리는 코니에게 ‘난 키스하면서 네 구토를 받아먹을 수도 있다’라고 한다.


연인 앞에서 속을 게우고 싶은 사람은 없다. 속을 게운단 건 컨디션이 바닥을 쳤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연인이 애초에 위기에 빠지지 않게 조치할 것이다. 찬 공기를 쐬면서 쉬게 하는 등의 행위 말이다. 혹은 이미 상황이 벌어졌다면, 빨리 수습한 후 몸보다 멘탈이 더 너덜너덜해졌을 연인을 보살필 것이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상상 못 할 말을 내뱉는다. 상상하면 몸서리쳐지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가정이 사랑의 본질일 수도 있겠다.


약을 먹은 것처럼 짜릿하고 웃음만 나는 시기는 지나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원망스러운 순간도 반드시 찾아온다. 내면은 그대로일지라도, 외부 상황이 사랑을 갈라놓기도 한다. 코니와 트리스탄의 결말처럼, 연인의 나약하거나 끔찍한 면을 보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 가장 두려운 건 ‘이 사람을 잃는 것’이란 걸 깨달을 때, 불완전한 점조차 미워할 수 없고 안쓰러워질 때. 설렘과 환상이란 약효가 사라지고 나서야 감정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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