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의 삶을 스쳐갔던 길고 짧은 인연들을 떠올려 본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만남과 가까운 사이였다가 멀어진 관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까지 빠짐없이 떠올린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광화문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추억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담는다.
1. 미망(迷妄):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
영화는 미망인 가진 세 개의 뜻에 맞춘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과거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변화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광화문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걷고 이야기하며, 과거로 돌아간 듯한 설렘과 즐거움을 전한다. 그러다 문득, 지나간 시간만큼 달라진 서로를 깨달아 아쉬움을 느낀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받아들인다.
그들의 관계에서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자신이 한 말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와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 같은 것들 말이다. 세종대왕 동상은 한때 철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광화문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상징이다. 여자는 수많은 공사로 예전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이 생기는 거리를 걸을 때마다 길을 헷갈리지만, 세종대왕 동상이 그녀의 위치를 알려준다.
연애 시절, 남자는 여자에게 세종대왕이 왼손잡이라는 썰을 말해줬다. 여자는 남자와의 재회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남자는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남자는 현재 여자친구에게도 세종대왕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 대한 현재 여자친구의 반응은 여자의 반응과 닮았다. 현재 여자친구가 남자를 대하는 털털한 성격과 사랑하는 마음, 그들의 관계까지, 그녀의 모든 게 여자의 모습과 비슷한 느낌이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했던 과거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해서 그 여자와 비슷한 사람과 연애하고 있는 듯하다.
2. 미망(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
첫 번째 에피소드의 미망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의 미망(迷妄)이라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의 미망(未忘)이다. 똑같은 광화문 거리를 걷는 여자의 옆에 새로운 남자가 함께한다. 여자는 그 남자에게 세종대왕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는 그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썰을 들려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여자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고, 처음 함께 발걸음을 내디딜 때의 불편함은 사라진 지 오래돼 서로를 향한 간지러운 마음만이 주위를 맴돈다.
새로운 남자는 여자를 대하는 모습이나 그의 사생활에서 첫 에피소드의 남자와 많이 달라 보인다. 그리고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다름을 받아들인다. 과거에 머물고 싶은 남자와 달리, 여자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감독은 에피소드뿐 아니라 두 주인공의 성향에서도 변화의 본질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은 관객에게 그저 흘러가는 관계를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3. 미망(彌望): 멀리 넓게 바라봄.
광화문에서 벗어난 세 번째 에피소드는 ‘멀리 넓게 바라봄’의 미망(彌望)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이름이 없다. 아마 관객들이 인물을 넘어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보고 얻어 가기를 바라서 이름을 짓지 않은 거겠지. 이번 에피소드를 이끄는 ‘정수’만이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다. 정수의 장례식에서 다시 마주한 남자와 여자는 남자의 동생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그들의 대화에서 예전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예전에 방문했던 선술집을 찾아 과거의 추억에 젖어갈 때쯤, 여자에게 온 전화로 또다시 현실을 마주한다. 여자는 급하게 자리를 떠나고, 남자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집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변화는 미래를 향한 설렘과 생기를 가져오지만, 과거의 아름다움을 앗아간다. 그래서 변화는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껏 살아오며 마주한 모든 관계를 되짚어보면,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는 공허함이 남았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상처가 되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몰라서 아파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한다고 생각했다. 변하는 것은 떠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첫 에피소드가 끝날 때쯤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어쩌면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변하더라도 그게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추억은 언제나 기억 속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머릿속에는 변화하는 것에 대한 생각의 충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하지만 결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남자가 떠난 버스를 가만히 보며 앉아 있으니 슬퍼지고 외로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든 건 변하고, 떠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