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우승한 2022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지켜봤거나 해당 콩쿠르 과정을 다큐로 담은 영화 <크레센도>를 본 사람이라면, 일리야 슈무클러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일리야 슈무클러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머리칼, 기진맥진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열정적인 연주, 연극적일 만큼 격한 움직임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더불어 반 클라이번 콩쿠르 당시 모차르트 협주곡 특별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렇게 홀로 쌓은 내적 친밀감 덕분인가. 일리야 슈무클러가 여러 차례의 콩쿠르 도전 끝에 마침내 게자안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괜히 반갑고 기뻤다.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의 연주도 궁금해졌다.
게자안다 우승 기념으로 열린 이번 내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은 바흐부터 슈베르트, 리스트, 드뷔시를 지나 무소르그스키까지, 마치 음악사를 전반적으로 훑는 듯한 방대한 레파토리였다. 다양한 작곡가를 다루는 만큼 피아니스트의 여러 면모도 충분히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한편으로는 프로그램이 꽤 길어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보통 1부를 채우기에도 충분한데, 일리야 슈무클러는 여기에 드뷔시 '영상' 1집까지 연주했다.) 그의 야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첫 곡은 바흐의 토카타 D장조. 시작부터 화려하고 빠른 타건이었다. 꽤 낭만주의적인 해석이 낯설게 다가왔지만 날카롭고 깨끗한 타건은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 이번에도 비교적 빠른 템포로 영롱한 연주가 이어졌다.
명료하게 한 음 한 음 살리는 연주라기보다는 페달링을 활용하여 잔향을 살린 화려한 연주였다. 그러면서도 지저분하지 않고 굉장히 깔끔한 소리가 나와서 놀라웠다. 슈베르트치고는 귀엽고 따뜻했는데, 슈무클러가 모차르트 특별상을 받은 이유가 납득되는 지점이었다. 그의 모차르트 해석이 궁금해졌다. 이날 프로그램에 모차르트 곡이 하나도 없어서 아쉬웠다.
1부 마지막 곡이었던 리스트의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중 7번 장송곡에서도 그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연주는 계속되었다. 특히 볼륨과 음향은 놀라울 만큼 컸다. 피아노의 음향을 극대화시키는 법을 아는 연주자라는 인상이었다.
2부는 드뷔시와 무소르그스키의 곡들로 채워졌다. 드뷔시의 '영상' 1집에서는 마치 리스트의 곡인가 싶을 만큼 강렬한 타건과 다이나믹이 느껴지는 해석이었다.
대망의 마지막 곡이었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곡 자체가 감정적이고 다이나믹이 매우 큰 편이다. 곡의 시작인 '프롬나드'는 전람회 관람을 시작하며 회랑에 들어서는 부분인데, 슈무클러는 시작부터 큰 대비로 드라마틱함을 더했다. '바바야가'에서 간혹 박자가 밀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모든 부분을 깔끔하게 치는 데 손색없는 테크닉이었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마무리되는 '키이우의 대문'의 피날레에서 슈무클러는 모든 화성을 칠 때마다 손을 힘껏 들어 올리며 최대치의 감격을 표현했다.
전반적으로 슈무클러의 화려한 테크닉과 드라마틱한 감정 표현이 한껏 강조되는 공연이었다. 다만 조금 더 큰 그림으로 곡을 다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순간 순간의 템포와 강약의 대비가 크고 갑작스러워서 곡을 전체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의문점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적이고 격한 연주를 하는 와중에도 조금도 음향적으로 지저분하다거나 명료하지 않다는 느낌 없이 깔끔하게 연주했다는 점은 확실히 놀라운 지점이었다.
슈무클러의 게자안다 콩쿠르 우승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앞으로도 그의 열정적인 행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