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추천공연➀
복수로 공감을 이야기하는 법
연극 <흑백다방>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밀양 연극촌에서 오는 7월 29일부터 8월 9일까지, 약 2주간 제15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가 열린다. 젊은연출가전, 대학극전, 윤대성 기획전, 가족극주간, 역사문화주간, 안톤체홉주간 등 다양한 테마를 가진 총 39개의 국내외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공연 프로그램 일정을 보니 이미 올 상반기 서울 공연 당시 호평을 얻었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필자가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 ‘흑백다방(작/연출 차현석)’과 ‘이방인의 노래(연출 박지혜)’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흑백다방’의 경우 작년 2인극 페스티벌에서 희곡상과 작품상, 연기상을, 올해 서울연극인 대상에서 우수작품상과 연기상을 수상하며 많은 화제를 불러왔던 작품이다. 필자에게도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2인극이었다.
2인극은 무대 위 오로지 배우 2명만이 존재한다. 무대 장치 또한 최소화하기 때문에 자칫 극의 전개나 무대구성이 단조로워질 수 있다. 더군다나 2시간가량이 배우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연극의 경우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반전시킬 수 있는 묘미 또한 2인극에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 2명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특별한 사건에 연루되어있으며 극중 갈등 관계를 통해 뿜어내는 긴장감만으로도 무대가 꽉 채워진다. 일반적인 극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대화를, 2인극에서는 서로가 줄다리기마냥 팽팽히 주고받으며 순간의 장면들을 살려낸다. 최소화된 무대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소품들에서 ‘보물찾기’처럼 극의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다.
이러한 2인극은 ‘인간’자체를 다루기에 최적화되어있다. 잘 다듬어진 2인극에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극적으로,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긴장감을 만든다.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갈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극으로 치달으며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낸 순간의 모습'. 연극 흑백다방이 보여주는 인간의 자화상이다.
줄거리
부산의 남포동에 위치한 ‘흑백다방’. 정성호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카운슬링해주는 이곳 다방 주인이다. 매일같이 다방을 열지만 1년 중 단 하루, 그가 쉬는 날이 있다. 바로 아내의 기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아내의 기일인 오늘이지만, 하필 오늘 카운슬링을 신청한 사람이 있다. 이 남자는 윤상호. 비에 흠뻑 젖어 뛰어 들어온 이 남자는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어떤 상처가 있어 찾아왔냐는 성호의 물음에, 상호는 계속해서 “선생님은 저를 믿으세요?”라고 물어보며 불안해한다. 이러한 그들의 관계가 서서히 밝혀지며 갈등의 국면으로 치닫게 되는데.......
흑백다방은 인간의 복수와 분노, 원한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복수를 하려고 한다. 이들의 광기 어린 분노는 과거에 벌어졌던 특정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거의 분노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현재의 복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가 가진 아픈 트라우마를 파고들며, ‘그 때처럼. 복수의 감정으로 나를 죽여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서로의 손에 칼을 쥐어주며 각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복수와 증오, 분노의 감정이 광기에 차올라 인간이 인내할 수 없는 극한까지 다다를 때, 정말 살인의 충동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들은 복수의 감정이 정점에 치닫는 그 순간. 또다시 가해자가 되기를 포기한다. 하지만 극은 이러한 복수의 장면을 통해, 과거의 한 부분이라기엔 너무도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상처가 한 사람 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유되며 얼마나 더 많은 상처들이 뻗어나가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이들에게 서로에 대한 화해와 용서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너무도 오랫동안 깊숙이 박힌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본인들 또한 서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서로의 상처가 결코 씻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의 상처도, 나의 상처처럼 지워지기 힘들다’는 인식을 통해 이들은 공감의 접점을 찾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었지만 잠시 가라앉히고, 서로를 다시금 알고자 노력하며 찻잔을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생긴 것이다.
믿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남자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던 남자. 이들은 부정할 수 없이 똑같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각자가 앉는 의자와 찻잔, 입은 옷이 서로 바뀐 채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말없이, 침묵으로 찻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돌아가는 LP판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며 서로가 함께, 더듬더듬 소리를 찾아간다.
"다방은 사람과 사람이 얘기하는 데야"
연극은 분명 현실적인 인간을 다루고 있다. 복수와 분노로 얼룩진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지만, 이들은 결코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 ‘사람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상적인 용서와 화해 또한 결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그 타협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의 진실된 감정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감정-상처를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이렇듯 이 극은 인간의 현실적인 자화상을 직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또 다른 방식의 공감이라는 가능성을 남긴다.
연극 흑백다방의 영화제작이 확정되어, 올 가을부터 크랭크인에 들어간다는 소식이다. 이번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뿐만 아니라, 조만간 무대와 스크린에서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다양한 문화예술 이야기가 있는_아트인사이트(http://www.artinsight.co.kr)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