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연희는 본래 길 위에서 행해지던 예술이다. 오늘날 그 역할을 이어받은 공간은 대학로의 지하 소극장들이 아닐까. 대학로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지금도 발밑 곳곳에서 저마다의 연극이 펼쳐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몬스터 허균> 역시 그런 비슷한 상상을 토대로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그 밑의 오래된 세계를 무대 위로 끌어온다. 시작부터 배우가 자연스럽게 등장해 관객들과 경계를 허무는 등 전통연희의 방식을 내세우는 것이 특징이다.
피 묻고 찢어진 옷이 크게 걸린 무대와 한복을 입은 배우들 사이에서 관객은 어느새 조선의 저잣거리로 흘러 들어간다.
극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뉜다. 먼저 <홍길동전> 내용을 마치 한 편의 판소리처럼 구현한다. 소설 속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향하는 것과 달리, 저잣거리 광대놀음에서는 왕의 목을 벤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판소리 특유의 창법과 말맛을 살린 전개도 재치 있었다.
서양 공연과 다른 우리나라 판소리의 특징은 관객이 조용히 보는 매너가 아니라, 함께 참여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자신들을 '산이'와 '받이'라고 소개한 두 배우는 고수처럼 양옆에서 추임새를 넣고, 다른 배우들도 수시로 박수와 호응을 유도했다. 공연 예절을 안내할 때도 관객들이 복창했고, 공연 중 객석에서는 "잘한다!" 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현대판 마당극'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홍보 문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그러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사형 집행 직전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고 소리쳤다는 일화에 상상력을 더해 극적으로 풀어낸다.
사실 허균의 삶을 잘 알지 못했기에 공연을 보며 놀라움이 컸다. 허균은 명문 사대부 출신 중 최초로 능지처참을 당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광해군, 이이첨과 함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이었던 기녀 이매창과의 정신적 교류도 한 꼭지를 차지한다.
전반부는 호흡이 빠르고 보다 가볍고 유쾌했다면, 후반부는 허균과 광해군의 관계를 중심으로 묵직한 감정 흐름을 쌓아간다.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고르게 갖춘 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홍길동과 허균의 모습이 겹친다.
특히 '몬스터 허균'이라는 제목답게, 조선에서 괴물 같은 사상을 품고 혁명을 꿈꾸었던 허균의 좌절과 백성들의 울분이 와닿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대한 풍자를 보며, 그래도 조금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지, 여전히 바뀌지 않은 점도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극은 여러 측면에서 전통연희 현대화의 좋은 사례로 보인다. 산받이 형식 자체도 현대의 연극과 잘 어우러졌으며, 북, 해금, 피리 등 전통악기를 기타, 키보드와 함께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어떤 부분은 판소리 같다가도, 힙합 리듬을 접목해 새로운 뮤지컬처럼 느껴졌다. 제42회 서울연극제에서 음악 부문 무대 예술상을 받은 이유가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힘과 합이 좋았다. 연기, 노래, 춤, 악기 연주를 다 소화하는 역량은 물론이고 무대 위 호흡도 훌륭했다. 특히 <홍길동전>의 한 대목에서 배우들이 나란히 서서 노래하는 장면을 볼 때 뭉클함을 느꼈다. 다른 성별, 나이의 사람들이 모인 모습이 그 자체로 평등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고, 그들이 연극에 바치는 열정이 아름다워 보였다.
형식은 옛것에서 따왔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오늘의 것. <몬스터 허균>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전통연희가 오늘의 연극 무대에서도 충분히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대학로 스튜디오블루에서 오는 11월 1일까지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