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없는 국가는 거울이 없는 집과 같다.Country without cinema is house without mirror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여 안녕> 시사회의 포문을 연 인사말의 끝에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인용문이 자리했다. 영화는 한 나라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과도 같다는 말. 그렇다면 게르만 크랄 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낸 아르헨티나는 어떤 모습일까.
작품이 비추는 것은 경제위기로 휘청이던 2001년의 아르헨티나다. 오랜 경기침체와 실업, 금융 불안으로 도시 전체가 휘청이는 가운데 작은 구두 가게를 운영하는 훌리오 역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그나마 삶의 낙이라면 동네 친구들과 결성한 탱고 밴드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것. 하지만 좋아하는 음악만으로 버티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결국 더 이상 이곳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훌리오는 가게와 집을 정리하고 독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때로는 가장 떠나고 싶은 곳이 가장 떠나기 어려운 곳이 되기도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려 할수록 새로운 인연이 그를 이 도시에 붙잡고, 마침내 모든 것을 정리했을 때에는 국가마저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는다.
흔들리는 시대, 흔들리지 않는 ‘신념’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금융위기 속에서 은행의 현금 인출을 제한하는 이른바 ‘코랄리토(Corralito)’ 조치를 시행했다. 독일행을 위해 가게를 팔고 받은 돈을 은행에 넣어둔 훌리오 역시 하루아침에 그 돈을 자유롭게 찾을 수 없게 된다. 국가적 위기가 개인의 삶까지 파고드는 가운데 시민들의 분노는 거리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진다.
바로 이 혼란 속에서 훌리오와 함께 밴드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는 ‘신념’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잊지 않고, 그 믿음에 따라 어떻게 살아갈지를 선택하는 것. 그는 실제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고, 이러한 모습은 독일행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에서 갈등하는 훌리오와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당장의 생계가 막막한 훌리오에게 신념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린다. 훌리오는 부패한 정치인을 위해서는 연주할 수 없다는 친구를 남겨둔 채 정치인의 아내를 위한 파티로 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이들이 부르는 곡은 부패와 위선으로 뒤엉킨 세상을 풍자하는 탱고 〈Cambalache〉.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절박하게 목소리를 내는 동안,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음악과 술이 흐른다. 영화는 그렇게 같은 시간,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존재하는 두 세계를 나란히 비추며 시대의 부조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한가운데서 현실을 위해 신념을 내려놓은 훌리오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친구의 선택 역시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직접 노를 저으며 선택한 ‘귀환’
시위에 참여했던 친구가 목숨을 잃고 도시의 혼란이 극에 달한 뒤에도 훌리오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거대한 배에 몸을 싣고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었던 도시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떠남이 현실이 되자 훌리오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이때 훌리오가 귀환을 실행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도시를 떠날 때 그가 올라탄 것은 거대한 배였지만, 돌아올 때 택한 것은 자신의 두 팔로 직접 노를 저어야 하는 작은 나룻배다. 처음에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자신을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구조물에 몸을 맡겼다면, 이제는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노를 젓는다. 더 나은 환경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주길 기대했던 사람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직접 선택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된 훌리오가 연주하는 마지막 곡은 〈Honrar la vida〉. 우리말로 옮기면 ‘삶에 경의를 표하다’라는 제목의 탱고다. 이 노래에서 삶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과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한때 친구의 신념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겼던 훌리오가 마지막에는 직접 노를 저어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이 곡은 더욱 의미가 있다.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화가 말하는 ‘삶에 대한 경의’가 아닐까.
가라앉지 않고 춤을 추자
영화에는 여러 차례 등장하며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 있다. 바로 물수제비다. 돌멩이는 물에 던지면 가라앉지만, 같은 돌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수면 위를 통통 튀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택시기사 마리엘라는 능숙하게 물수제비를 뜨지만 훌리오가 던진 돌은 번번이 수면에 닿자마자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같은 돌이라도 누군가는 물 위를 춤추듯 나아가고, 누군가는 그대로 가라앉는 모습은 삶의 무게를 대하는 인물들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국가는 흔들리고, 은행에 맡긴 돈은 찾을 수 없으며, 일자리는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끊임없이 이들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연주하고, 사랑에 빠지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거리에 나선다. 세상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무너지는 현실 한가운데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간다.
이처럼 삶에는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있고, 그 무게에 그대로 가라앉고 싶은 순간도 찾아온다. 그렇다고 슬픔이 모두 지나가기를, 완벽한 세상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삶을 미뤄둘 수만은 없다. 물속으로 가라앉을 무게를 지니고서도 수면 위를 춤추며 나아가는 돌처럼, 우리도 그렇게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무게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무게를 품은 채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몸을 던지면서.
그러니 우리, 가라앉지 않고 춤을 추자. 사랑하는 사람과 믿는 것들을 붙잡고, 지금의 무게를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