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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조금 고약하고 많이 재미있는 여자, 노라 에프런 [도서]

노라 에프런이 남긴 에세이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를 읽고

by 손혜림 에디터
2026.10.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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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잠깐 구글로 그 제목을 검색해보고 오려고 한다. 금방 돌아오겠다.

      제목은 행운의 반전이다. 도대체 누가 이 제목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의미가 없는데.”

       

      P.11

       

       

      책을 읽다가 실소가 터졌다. 노라 에프런의 에세이 <내게도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에서 기대했던 내용은 이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차례를 다시 살펴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구글로 제목을 계속 검색하고 오겠다는 그녀를 보며, 역시 노라 에프런이다 싶어 편하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노라 에프런은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줄리 앤 줄리아>등을 연출했다. 여성 감독이 많지 않았던 할리우드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인물이다.


      그녀는 에세이 첫머리부터 자신의 건망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원래도 건망증이 심했지만 요즘에는 무언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잊어버린다며, 노화의 징후는 육체적인 것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족한 면을 이토록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유쾌하기까지 하다. 할리우드 명문 집안에서 자라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을 지적인 여자의 글이겠거니 했던 건, 어쩌면 내가 만든 프레임이 아니었을까.

       

      체면을 지키거나 가식을 부리느라 에둘러 말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자신의 부족함과 실패를 유머로 이야기하는 그녀가 좋았다. 아, 역시.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저렇게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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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이런 몽상을 한다.

      내가 죽어갈 때, 그 작품을 부활시킬 만한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침상에 다가와 작별 인사를 던질 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그 사람은 동의한다. 다른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덧붙인다. "제 희곡을 다시 무대에 올려주시겠어요?"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

       

      P.173

       

       

      자신의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토록 솔직하게 이야기하다니. 자신의 모습을 멋지게 포장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사람. 부족함과 실패뿐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한 애처로움마저 숨기지 않는 사람. 자신을 대단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사람만의 멋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람. 진실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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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영화를 보면 아름다움과 꾀죄죄함이 공존하는 순간들이 있다. 세련된 취향과 시니컬한 대화, 유머와 풍자, 그 사이에 자리한 풍부한 감수성까지. 서로 다른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방식은 그녀의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발견한 그녀의 솔직한 시선은 어쩌면 내가 영화에서 좋아했던 매력과도 맞닿아 있는지 모르겠다.

       

       

      “실패의 장점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한 성공에 대해, 실패의 힘에 대해 책을 쓴다.

      그들은 실패가 성장의 경험이었고, 실패로부터 뭔가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길 바란다.

      내가 보기에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P.173

       

       

      시니컬하며 심드렁하다. 실패를 그럴듯한 성공담으로 포장하지 않는 태도가 좋았다. 실패를 통해 반드시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앞으로도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그녀. 그녀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저렇게 멋지게 늙어갈 수 있을까. 개인적인 서사에서 출발해 인생에 대한 소회까지. 여성으로 살아오며 지나온 시간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글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하나의 작은 좌표가 된다.

       

      책 뒤에 실린 이경미 감독님의 추천사가 와닿았다.  “조금 고약하고 많이 재미있는, 알고 보면 유능한 할머니! 젠장, 멋진 판타지가 생겨버렸다.”

        

      어느 때보다 집과 책에 가까이 머무는 하루. 아파트 창문 너머로 위윙위윙 바람 소리가 짙게 들린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해가 지면 어두운 도시를 거닐어야지. 익숙한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Sleep in Seattle OST를 듣는다.  책에서 만난 그녀의 문장들이 음악과 겹쳐진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이야기로 담아낸 노라 에프런의 시선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노라 에프런 책과 함께한 Sleep in Seattle OS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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