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의 오늘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나는 오래도록 하나의 장면을 먼저 꺼내 들었다. 2021년 한 경연 프로그램에서 루프스테이션으로 거문고 소리를 겹겹이 쌓아 올리던 연주자 박다울의 자작곡. 처음 그 무대를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뒤로 내게 '새로운 거문고'란 전자음향과 만나고 서양음악과 손잡고 장르의 경계를 넘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전통음악의 대중화를 말할 때 우리가 흔히 꺼내는 세 단어—현대화, 협업, 세계화—도 대체로 그 방향을 가리킨다. 바깥으로 나가는 것. 다른 것과 섞이는 것.
10월 8일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에서 만난 이재하의 〈현금제: 이중번역〉은, 그 전제를 아주 정중하게 흔들어 놓았다.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한다는 역설
공연은 암전에서 시작했다. 2분가량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문고의 괘를 짚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시선을 차단한 채 귀만 열어 두게 만드는 설계였다. 그리고 1장 '무엇'의 첫 소리는 해금이 내는 기계음, 심장이 멎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불협과 어긋남으로 출발하는 음악. 연주자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멈춘 심장의 소리에서 시작하는 음악이다.
작품의 제목인 '이중번역'은 이재하가 오래 붙들어 온 질문에서 나왔다. 민속음악에는 원전이 있고,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들조차 실은 번역된 무언가를 연주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르게 연주하려는 사람은 번역본을 한 번 더 번역하는 셈이다. 물려받은 음악을 나의 언어로 옮기고, 다시 시대의 요구에 맞춰 한 번 더 옮긴다. 새로 쓸수록 마주하게 되는 것은 존재한 적 없는 원전을 향한 유턴이다. 전통을 잇는 동시에 새로워져야 한다는 두 개의 명령이 충돌하는 자리, 작품은 정확히 거기서 출발한다.
세 개의 장은 끊김 없이 40분 동안 이어진다. 1장 '무엇'은 민속음악 안에서 조성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무언가를 더듬어 찾는 과정이다. 무엇을 찾는지도, 찾는 그것에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찾는다는 고백이 그대로 음악이 된다. 2장 '어긋'은 동해안별신굿 장단인 드렁갱이를 가져와 즉흥으로 풀어낸다. 변화무쌍한 장단은 듣기에 헷갈리고 어긋난 듯하지만, 그 '엇'을 공유하고 있는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어긋나는 순간이 곧 무기가 된다. 함께한 김승태(해금·타악)와 신원섭(메탈로폰·오귀장구·타악)의 호흡이 그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 줬다. 김승태는 이재하가 윤서경, 이영섭과 함께 ‘4인놀이'로 오래 합을 맞춰 온 동료이기도 하다. 서로의 악기로 숨을 주고받으며 쌓아 온 시간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어긋남이었다.
3장 '명금(鳴金)'은 그 자신의 거문고 산조다. 기존 거문고 산조에 없던 휘모리 다스름과 진양·중모리의 우조, 평조, 타령, 늦은 자진모리를 새로 짜 넣었고, 장구나 소리북 대신 금속 타악기를 편성했다. 징으로 거문고 울림의 한계를 확장하고, 꽹과리로 거문고 음색에 부족한 밝고 경쾌한 결을 채워 맑은 신명을 돋운다. 이날은 지영희류 해금산조와의 결합까지 시도했다. '울릴 명'에 '쇠 금', 제목 그대로의 음악이었다.
'엇'은 체화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공연 뒤 연출가 정종임이 사회를 맡은 인터뷰에서, 이재하는 올해의 주제어에 대해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엇나가려면 먼저 충분히 정형화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엇나간 뒤에 돌아올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는 것. 즉흥조차 치밀한 축적 안에서만 나온다는 말이었다.
그가 오래 불편해한 것은 기록의 방식이었다. 전통음악을 스승에게 구음으로 배웠던 그는, 악보라는 제도권의 기록이 들어오면서 음악이 정형화되고 서열화되는 흐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복잡한 음악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이날 무대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구음이었다. 원래 하지 않았고 해 본 적도 없지만, 이 자리만큼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날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구음이었다. 그는 스승에게 구음으로 음악을 배웠지만, 악보라는 제도권의 기록 방식이 들어오면서 음악이 정형화되고 서열화되는 것을 오래 불편해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이 소리를 내 본 적은 없었다고 했다. 이 무대에서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해 처음 목소리를 냈다고. 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 해야만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망설임, 끝나자마자 찾아온 후회, 그럼에도 김희수아트센터라는 공간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마주하게 해 주었다는 말.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았다는 문장이 오래 남았다.
이 선택이 얼마나 공교로운지는 그가 오래 품어 온 '현금제'라는 이름을 알고 나면 더 선명해진다. 거문고에는 음에 따라 당, 둥, 동, 징, 등, 덩, 흥, 청으로 소리 내는 구음법이 있고, 그 구음은 그 자체로 훌륭한 한 곡의 노래가 된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제사란 현재의 사람이 과거의 사람을 불러내어 둘이 결국 하나의 생명임을 증명하는 행위다. 그 틀 안에서 거문고는 축원의 영물이 되고, 연주자는 그 앞에 선 제주이자 영접자가 된다. 과거와 현재가 통하는 일이 곧 미래의 약속이라는 생각. 그렇다면 악보에 담기지 않는 소리를 자기 목으로 직접 불러내는 일만큼 이 작품에 어울리는 행위도 없었을 것이다.
한 발짝씩 어긋나 보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 무대가 내게 남긴 것은 아름다운 소리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전통음악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그동안 너무 바깥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에 가까웠다.
다른 장르와의 협업이나 새로운 기술의 도입만큼이나, 전통음악 내부에서 벌어지는 시도 역시 그 자체로 현대화의 동력이 된다. 오늘을 사는 사람이 과거의 음악을 계속 연주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끊임없이 보러 오는 것만으로도 음악은 이어진다. 현대인의 감각으로 과거의 음악을 다시 읽고, 그 문법 안에서 용감하게 새로운 문법을 써 내려가는 일. 어쩌면 그것 또한 현대화이고 대중화이고 세계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프스테이션도 전자음향도 여전히 대단하고 독창적인 방법이지만, 각 연주자가 자기만의 음악적 언어를 만들어 끝까지 지속하는 일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이번에야 제대로 알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 가지가 더 따라왔다. 과거의 기록을 오늘의 언어로 옮기며 끝내 존재하지 않는 원본을 향해 유턴하는 일은, 사실 역사를 다루는 사람의 작업과도 꼭 닮아 있다. 오늘의 역사가와 오늘의 국악 연주자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하면서, 그 과정에서 무엇이 남고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
새로운 것을 향해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는 이 40분 동안 절절히 느꼈다. 그것도 가장 익숙한 자리에서, 수십 년 짚어 온 괘 위에서 한 발짝씩 어긋나 보는 방식으로. 세 장은 끊김 없이 이어지지만 끝내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닫히지 않는 순환 속에서 답 대신 의미를 찾아내는 한 연주자의 기록. 그것이 〈현금제: 이중번역〉이었다.
수림뉴웨이브 2026 [엇]은 11월 5일까지 매주 목요일 이어진다. 정박의 익숙함을 깨는 저마다의 유쾌한 이탈을, 이제 몇 번 더 들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