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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재조명 작업 - 15. 전단지 TMI

전단지와 감자탕의 상관관계

by 한세희 에디터
2026.10.0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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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산책을 하다 도인 포스를 풍기는 사람에게 기(氣) 치유 전단지 한 장을 받았다. 팥죽색 계량한복 차림에 장발을 단정히 하나로 묶은 그는 산책 중인 사람들에게 아무 말없이 종이를 건네고 있었다. 전단지를 바로 앞에서 버리는 건 옛 종사자(?)로서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집까지 들고 와 잘 처리했다는 심심한 고백을 남긴다.

       

      기수련이라고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있는 동안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전단지를 돌렸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로 안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추억은 이상하리만큼 많다. 하기 싫은 일의 거지 같음과 그 속에서도 꾸역꾸역 피어났던 나름의 재미와 고생 끝에 알게 된 감자탕의 참맛 같은 그런 잔상이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

       

       

      전단지(모자이크).jpg

       

       

      자질구레해서 어디다 말하기도 짜치는 일들. 하고 싶은 일 안에 숨겨진 더럽게 하기 싫은 일들. 애초에 이 두 가지가 동등한 비율로 존재할 수 없음을 하기 싫은 일을 통해 알아가는 중이다. 깨달음의 시초는 ‘전단지 돌리기’였다. 전에 근무하던 학원에서 홍보 전단지를 돌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초등학생 1학년 예비 소집일, 입학식, 방학식, 개학식과 같이 굵직한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은 원생 모집에 있어 최대의 대목이다. 날마다 쉽게 오는 날이 아니니 대목 앞에서는 폭염도 한파도 고개를 수그려야 한다.


      여름 방학식이었나 개학식이었나. 출근과 동시에 전단지를 챙겨 나와 학교 정문 앞에서 사십 분 가량을 돌린 다음 다시 수업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개개인별 진도와 가르치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빠듯했던 나는 속으로는 이 상황을 정말 별로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홍보물이 담긴 A4 용지 박스를 품에 안았다. 오후 한 시를 넘기자 아이들이 학교 건물에서 하나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도 정문 쪽으로 서서히 모여들었다. 북적이는 정문 앞에서 그렇게 정신없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데 그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와 마주쳐 버렸다.


      “쌤, 여기서 뭐해요?”


      5학년 여자 아이가 이 사람이 지금 여기 왜 있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학원 밖에서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우리였기에 당연하게 튀어나온, 정말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 말이었겠지만 듣는 나는 가슴이 뜨끔거렸다. 더 깊이 내려가면 내 스스로가 변변치 못하다고 느끼는 데서 나왔던 민망함이었을 테다. 순간적으로 움찔한 나는 이따 학원에서 보자며 얼른 가라는 듯이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수업 때 다시 그 애를 만났다. 쥐구멍이 필요했던 나는 이미 의욕을 크게 잃어버린 상태였다. 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숨고 싶은 마음을 아이 앞에서 잘 숨겼는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당시 유일한 앎이라고는 작아지는 내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는 건 꽤나 괴롭고 쪽팔린다는 거였다.

       

       

      전단지 돌리기.jpg

      *ai 생성 이미지

       

       

      아무튼 그때의 전단지는 망할 전단지가 맞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내게 거지 같은 기분만 선사한 것은 또 아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어느 시점부터는 별로인 순간 속에서도 재미란 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엉뚱하게도 그 재미를 ‘관상’에서 찾았다. 때려치우지 않는 이상 어차피 해야할 일인데 계속 불평하는 것도 지쳐서 재미거리를 찾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관상가다, 무슨 관상가냐면 저 자가 과연 전단지를 받을 상인가 아닌가를 맞추는 관상가다, 오늘 내가 관상을 봐야 할 사람은 대략 100명 정도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니까 도파민이 싹 번지는 느낌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을 장착하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천천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건네고 거절 당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나름 통계도 내게 되더라.


      전단지를 받거나 안 받거나 받자마자 버리거나 받고 나서 다시 돌려주는 것도 받는 이의 마음이라는 것, 길을 걸을 때 대체로 다들 무표정이지만 기분이 정말로 심하게 안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억지로 건네지 않을 것, 특유의 신경질적인 기운을 조심할 것, 멀리서부터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않을 것, 그러면 받을 사람도 안 받고 싶어진다는 것, 통화 중이거나 대화 중인 사람들은 그래도 엉겁결에 잘 받아준다는 것, 불특정 다수인 그들은 나를 그닥 신경쓰지도 않으니 이 일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임시 관상가로서 내가 얻은 정보들이다.


      또 다른 재미는 업계의 동향을 문밖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는 것이었다. 실내에서만 모으는 정보가 아니라 바깥으로 나갔을 때만이 체감할 수 있는 날 것의 분위기 같은 것을. 아이들이 적어 반 수도, 학급 인원도 현저히 줄어든 암울한 사교육 시장 속에서도 업계 사람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태권도, 합기도, 발레, 줄넘기, 미술, 피아노, 바이올린, 영어, 독서논술, 공부방, 각종 학습지 브랜드 등등 각 분야의 관계자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정문 앞에서 입학식 주인공을 기다린다. 그러나 다 같은 마음은 아니다. 교과목 수업은 그래도 수요가 있는 편이다. 예체능은 필수가 아닌 한번 시켜 볼까의 영역인지라 경기 흐름을 더 탈 수밖에 없다. 하게 되더라도 저학년까지라는 암묵적인 기한이 있다.


      그러니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대목을 위해 다들 힘을 잔뜩 주는 거다. 전단지는 전단지고 같이 건네는 선물에도 신경을 엄청 쓰게 된다. 젤리와 사탕을 넣은 간식 구디백에서부터 연필과 볼펜과 노트를 한데 묶은 문구 세트, 학원 로고가 박힌 파일 가방과 신발주머니까지 그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그때 봤던 선물 중에 가장 신박했던 것은 태권도 학원에서 준비한 음식물 쓰레기봉투였다. 이제는 흔한 서비스 선물이 돼 버렸지만 십 년 전만 해도 쓰레기봉투는 굉장히 신선한 선물에 속했었다. 정문 앞에 서 있던 업계 사람들 모두가 저걸 어떻게 이기냐는 표정을 지었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 내 돈 주고 사면 괜히 아깝고 남이 주면 그렇게 좋은 것이 쓰봉이더라를 그 관장님은 미리 알고 계셨던 듯하다.

       

       

      감자탕.jpg

      *ai 생성 이미지

       

       

      겨울 싫어 인간에게 전단지 돌리기는 고역 그 자체. 살이 아리도록 추운 2월 아침에 해도 안 드는 곳에서 이가 딱딱 소리를 낼 정도로 떨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곧 인성이 파탄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삐뚤어지기 전에 밥을 먹으러 가게 됐다. 이른 오전이라 손님이 없어서 식당이 휑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코가 루돌프처럼 빨갰다. 바닥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온몸에 찌릿찌릿하게 퍼질 때쯤 커다란 감자탕 냄비가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게 감동이었다.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가슴을 뻐근하게 훑고가는 일이 이토록 아름다웠었나. 손끝, 발끝, 귀끝, 코끝이 얼었다 녹는 일이 이렇게 살 것 같은 일이었나. 나를 제외한 두 분의 선생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듯했는데 감자탕에 제대로 꽂혀버린 인간은 그런 게 들릴 리 없었다. 추운 날 전단지 작업 후의 감자탕이 진리이자 하나의 완벽한 루틴처럼 느껴졌으니까.


      고통과 감동이 항상 세트처럼 묶여 있기를 바랐다. 그치만 그런 그림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이라는 걸 이제 조금 알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다 감자탕의 참맛을 우연찮게 알아 버린 것도 힘들어서 징징대다가 하나 얻어걸린 거라고 보면 된다. 피하고 싶은 일 앞에서 언제쯤 의젓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 인생의 참맛을 진실로 깨우치는 사람들은 정말로 뭐 하는 사람들일까. 거기까지 아직 못 가 본 나는 고작 감자탕이 어떨 때 제일 맛있는지만 안다.


       

      *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고

      그 가치를 기록하는 <재조명 프로젝트>의 작업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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