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홍콩에 간다.
여행을 앞두고, 개인적으로 홍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인 <중경삼림>을 다시 보았다. 왕가위 감독은 다른 영화를 찍다 지친 마음을 리프레시하기 위해 <중경삼림>을 아주 가볍게, 무려 23일 만에 찍었다고 한다. 그런 즉흥성 때문인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땐 머릿속에 물음표가 500개 정도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보고 나면 금방 발화되는 영화가 있지만, <중경삼림>은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과 대사가 많아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다.
통조림을 모으는 남자와 집 안의 물건에 말을 거는 남자
<중경삼림>은 실연당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엮은 옴니버스식 구성의 영화다.
1부는 경찰 223(금성무)과 금발 가발을 쓴 여자(임청하)의 이야기, 2부는 경찰 663(양조위)과 식당 직원 페이(왕페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두 에피소드는 하지무(경찰 223)가 자주 가는 식당 주인이 그에게 페이를 소개시켜주는 장면이 나오면서 연결된다.
1부의 하지무는 만우절에 이별 통보를 받고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 전 애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포기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한 달 동안 매일 사 모은다.
결국, 5월 1일이 될 때까지 전 애인의 연락을 받지 못한 하지무는 한 달 동안 모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두 먹고 술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금발 가발을 쓴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쉬고 싶다는 여자의 말에 함께 호텔로 가지만, 바로 잠에 든 여자의 옆에서 하지무는 그녀의 구두를 닦아주곤 호텔방을 나가며 1부는 막을 내린다.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유통기한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유명한 1부 속 하지무의 대사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이지만, 금성무가 말하니 어쩐지 그의 사연 있는 사랑을 알고 싶어진다. 떠나간 사랑을 붙잡고 싶어 하는 하지무의 실연을 담은 1부, 그 속에서 하지무는 유통기한이 없는 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은 유통기한을 정한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기진 않는 것 같다.
2부에서는 경찰 663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663은 전 여자 친구가 떠난 뒤, 집에 남아 있는 그녀의 물건들에게 말을 건다. 슬픔에 잠겨있는 집 안의 물건들을 위로한다는 핑계는 그가 실연 후에 밀려오는 공허함을 달랠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난 후, 방 안의 모든 물건이 슬퍼한다.
한 편, 손님인 663을 좋아하게 된 페이는 슬픔에 잠겨있는 그의 집 안 물건들을 하나씩 바꾸어준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들을 하나씩 바꾸어주는 왕페이를 보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663에게는 페이의 행동이 전 애인이 남긴 집 안의 질서를 바꾸며 실연 후의 공허함이 몰려오는 집 안의 공기를 극복할 수 있게,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그런 페이와 사랑에 빠진 663은 페이와 만나려 하지만, 정작 페이는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 대신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 페이는 다시 663을 만나고 2부는 막을 내린다.
안 온 게 아니다. 장소를 착각한 것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사랑의 속성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본 영화에 대해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곧 사랑하게 될 사람들, 또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막 헤어진 사람들이 마치 치료하듯이 보아야 할 영화'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에피소드는 모두 사랑이 시작하기 전에 막을 내린다. 하지무는 부정했던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고, 663은 또다시 사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항상 반복적이다. 마음속에서 사랑을 쫓아내도 다시 사랑이 찾아오는 불가피한 반복 속에 모두가 놓여있다.
결국 모든 일이 그렇듯 사랑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유통기한을 아무리 길게 정하더라도 하지무의 사랑은 끝나버렸고, 새로운 사랑을 곧 시작할 거라고 믿었던 633은 페이를 1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사랑에 빠진다. 사실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연에 고통받지만 그럼에도 인물들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성일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이 영화는 치료제와 같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유한함을 가르치고, 곧 사랑하게 될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사랑의 예측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막 헤어진 사람들에게는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위로를 건넨다. 청춘의 불안과 혼란을 다루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인 것 같다.
요컨대 <중경삼림>은 실연을 겪는 두 남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애도하고 새로운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사랑은 유통기한에 귀속될 수 없고, 우리는 반복적으로 사랑한다. 이 영화가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도 사랑이 늘 예측 불가능하고 뜻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특히나 여름에 다시 보고 싶어지는 것도 여름이라는 계절이 가지는 상징성과 네 인물이 관객과 함께 사랑에 있어 고통을 견뎌내고 성장을 거듭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 봤을 때의 강한 인상과 여운에 다시 찾게 되는 <중경삼림>을 보니 올여름의 홍콩 여행이 더욱이 설레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