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8혁명의 실패 이후, 허무주의의 일본
68혁명의 실패로, 7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정치적 허무주의와 소비 사회로 전환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토니 타키타니」는 이러한 70년대의 정서를, 하루키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과 함께 정밀히 담아낸 작품이다. 거대담론을 다루지 않는 대신 그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고독한 일상, 삶의 면면이 소설 내에서 내비춰진다.
소설의 주무대는 80년대로, 1949년생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둔 것과, 재즈 카페를 운영했던 하루키의 인생 궤적이 겹쳐 보이기도 하다. 버블시대 속 토니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지만 그의 인생은 고독으로 한 땀 한 땀 젖어 있다.
기존 무라카미 하루키는 1인칭 소설을 자주 쓰는데, 이 단편은 3인칭으로 쓰였다. 이것은 필연적인데, 고독은 ‘존재’하는 것이지 나와 ‘합일’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여러 고독한 인물에 대해 ‘보여준다.’ 타키타니 쇼자부로, 토니 타키타니, 타키타니 에이코, 히사코. 영화는 이 소설의 거리감과 시점을 토니의 내면 나레이션으로 소화해냈다. 영화는 이들의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천착하는데,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천천히 이동하며 의도적으로 인물과 주변 전경을 보여준다.
토니의 그림은 “기계류의 세밀한 부분을 아주 정교하게 그리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의 대학 시절은 젊은이들이 권위나 체제에 대항해 반항하던 시기-무라카미 하루키는 68혁명이 시작되던 68년도에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였으므로 사상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그러나 68혁명이 저문 이후, 소비사회로 진입할 때 토니가 그려내는 정교하고 세밀한 그림들, 사진보다 더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그림은 그에게 부 역시 안겨준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삶이나, 사회와 불화하지 않는다. 이미 이 소설 속 세계는 고독으로, 그 공백을 꽉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사무치는 외로움, 딱 사람만 한 구멍이 세상에 수십억 개 나있다고 하면 끔찍하다.
2. 여자A
고독이란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야. 그는 날마다 자신을 둘러싼 벽의 두꺼움과 차가움을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난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를 만나 그런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고독했고, 얼마나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그녀가 그 사실을 자기에게 깨닫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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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의 아내는 자신의 고독을 쇼핑으로 채우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에이코로 A子, 즉 ‘여자 A’로도 들리기도 한다.
그녀는 조용하고 평범한 인물이지만 아주 맵시 있게 옷을 입는다. 토니는 그녀가 가진 것에서 강렬한 매혹을 느끼는데, 이 매혹은 고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월급의 대부분을 옷값으로 날려버리는 인물이며, 결혼 이후 낭비벽은 더욱 심해진다. 옷을 좋아하는 걸 넘어서 옷을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소비를 그만둘 것을 결심하여 환불하고 오는 길에 사망하기까지 한다.
에이코는 토니와 같이 본질적으로 고독한 인물이며, 그 고독을 ‘소비’의 감각 자체로 채우고 있다. 평생 다 입지도 못할 옷들을 계속 사들이는 것.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무언가를 사들여 집을 채우거나,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들을 사는 효용에 중독되는 것이다.
나도 마음이 힘들어질 때마다 배고프지 않아도 식당에 들어가 굳이 무언가를 사먹거나 배달을 시키는데, 먹어도 정신적인 허기는 사라지질 않고 후회만 계속하게 된다. 이런 소비중독은 나뿐이 아니라 전반적인 요즘 사회의 세태가 그렇다. 영화판에서는 에이코와 히사코를 모두 미야자와 리에가 연기했는데, 같은 사이즈의 고독을 보고 우는 히사코의 모습이 절묘하다.
외로움을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하고, 그렇기에 우리는 만남을 지속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 본질적인 고독을 채워주지는 못한다는 것이 끝내 괴롭게 만든다. 결국 결말에서 토니에게 남는 것들, 존재가 사라진 뒤 부재로 남는 것들은 오로지 물건과, 그가 혼자라는 사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