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는 개인이나 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이다. 풍자를 활용하는 작품 속에서 현실은 허구를 통해 우회적으로 재현되고, 관객은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대상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에 풍자는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르이다.

연극 '구미식'은 역시 이러한 정치풍자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작품은 현실을 보여주는 데 있어, 오히려 연극이 허구임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드러낸다. 배우들은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극 중에서 테네시 윌리엄즈의 희곡 '유리 동물원'을 활용했다는 점을 대사로 직접 설명하며, 앞으로 등장할 장면을 예고하기도 한다. 혹은 관객에게 독백해도 괜찮을지 묻기도 한다. 더해서 여러 플롯이 공존하는 이야기와 서사를 계속해서 중단시키는 광고 팝업은 관객을 계속해서 현실로 끌어내며, 자신이 연극을 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작품은 여러 이야기를 함께 충돌시킨다. 새마을 운동 기념 공원이 세워져 있는 가상의 도시 구미시에는 특정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유리 동물원'의 톰은 클로짓 게이이자 약물 중독자로 등장한다. 약물중독으로 인해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흐려지는 가운데, 톰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속 제비가 되어 동상이 시키는 대로 과거 동상의 추종자들에게 보석을 나눠주고, 그 대가로 약물을 받는다. 서로 다른 텍스트가 겹치고, 현실과 환상이 모호해지는 경계 사이에 구미에서 태어난 극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역시 삽입된다. 하나의 이야기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작품은 수많은 이야기의 중첩을 통해 보여준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중첩된 이야기 속에서 작품의 질문은 풍자의 대상으로까지 향한다. 가슴팍에 구멍이 뚫리고, 산업화, 계엄, 고문 등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를 하는 동상은 특정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누구를 의미하는지 연상하도록 만든다. 보수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가진 구미에서 우상화를 과장되게 재현하며 극우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동상과 추종자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관객에게 계속해서 웃음을 유발하나 연극의 마지막에서는 과연 누구를 조롱하며 웃어야 하는 것인지 불분명해진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은할머니는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우상화했던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가족 안에 편입되지 못한 채 제도상으로는 완전히 삭제된, 작가의 기억 속에 작은할머니라는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작품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과연 대통령 개인일지, 아니면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사람들일지, 아니면 그러한 믿을 만들어 낸 구조 자체인지 '구미식'은 단순히 풍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비판의 대상과 그 의도까지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은 작품 전반에 반복되는 광고와 숏폼, 찌라시와도 연결된다. 광고는 서사를 중단시키고, 숏폼 광고들은 맥락 없이 무의미한 정보들을 과도하게 제시하며, 찌라시는 사실과 거짓을 뒤섞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관객은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이며,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인지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현실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 정치적 선전과 광고 속에서 살아가며, 그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이념과 가치관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구미식'이 여러 서사를 의도적으로 뒤엉키게 만드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는 듯하다.
![[돌파구] 구미식(26-0612)_ⓒShin-joong Kim_02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30091536_wstqftro.jpg)
연극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바로 극장이다. "세상 모두가 말합니다. 현실은 그대로라고. 사실을 바꿀 수 없고 현실은 언제나 늘 거기에 있다고. 그래서 극장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라는 대사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빠르게 제공되는 사회 속에서, 연극은 관객을 극장이라는 한 공간 안에 앉혀 두고, 80분 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하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연극은 허구를 진실처럼 포장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이 허구임을 선언한 채 그 안에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구미식'이라는 제목 역시 이러한 이중성을 품고 있다. 한편으로는 구미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처럼 읽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매매를 뜻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작품은 제목부터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기를 거부한다. 현실은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으며, 인간 역시 자신이 태어난 환경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이해하는 이야기는 바뀔 수 있다. 어떤 정상성의 체계 안에서 태어났든,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든,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어쩌면 '구미식'이 말하는 극장의 역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현실을 대신하는 허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의심하고, 그 너머의 가능성을 함께 상상하는 공간. '구미식'은 그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