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7회 서울연극제 자유참가작 연극 <로테/운수>가 5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공간아울에서 공연된다. 연극 <로테/운수>는 창작집단 하이카라의 여성 2인극으로써,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새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하나의 무대, 두 명의 인물

연극 <로테/운수>에는 로테와 운수가 등장한다. 로테와 운수는 1막과 2막의 경계로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막 위에서 목격자로 등장함으로써 배역 간 교차 없이도 각자의 서사는 연결된다. 1막에서 로테는 온통 새하얀 무대 위에 오른다. 로테는 젊은 나이에 낙성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로 재임 중이다. 서로 틱틱되지만,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그녀가 정신과 상담실에 방문한 까닭은, 대학교 제자에 의한 스토킹 범죄 때문이다. 대학교 제자는 로테의 사진을 수집하고, 로테의 집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붉은 장미를 두는 등 기이한 범죄를 지속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베르테르가 자신의 정념을 로테에게 마음대로 퍼부었던 것과 같이. 자신의 편안하고 소중했던 공간에 베르테르의 흔적이 쌓여갈수록 로테의 공간이 축소되어 간다. 로테의 마음을 표현하려는 듯, 1막에서는 내내 검은색 페인트가 온 바닥을 휩쓸어, 로테의 공간을 앗아갔다.
2막은 이미 검게 물든 바닥 위에서 시작한다. 죄수복을 입은 도예가 이운수는 법정에 선다. 이운수는 남편의 머리를 설렁탕 뚝배기로 10회 이상 가격하여 살해한 죄로 기소된다. 변호인은 피고인 이운수가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음을 피력하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이운수가 자신의 폭력 피해를 진술할 때면 그 옆에서 로테 역을 맡았던 김보나 배우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구절을 나직이 뱉어낸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김 첨지를 중심으로 1920년대 도시 하층민의 핍진한 삶을 그려낸다. 대부분의 중등교육 과정에서 학습하는 소설인 만큼, 특정 대사-‘우라질 년’, ‘왜 먹지를 못해’-는 여전히 패러디가 되는 중이다. 작중 김 첨지는 자신의 무능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아내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였을 때, 김 첨지를 단순 가정폭력을 한 인물로 해석하는 것은 협소하다. 다만 연극은 여성 대상 폭력을 시대적 비참함을 그려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가정폭력을 비추고자 했다.
여성의 공간으로써, 병원 그리고 법정

연극 <로테/운수>는 폭력이 폭력이 되는 구조에 주목한다.
로테를 스토킹한 베르테르와 운수를 무참히 때린 김 첨지만의 문제가 될 수 없는 여성 대상 폭력 문제의 이면을 부각한다. 로테가 제자의 스토킹으로 자신의 집조차 들어갈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베르테르의 행위를 범죄가 아닌 젊은이의 치기어린 사랑으로 취급했다. 적절한 처벌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그마저 로테에게는 용서를 강요했다.
한편, 범죄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남자 친구와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통 속 찾은 정신과 상담실에서조차, 의사는 로테의 진술을 망상 취급할 뿐이었다. 운수는 결혼 생활 내내 남편에 의한 폭력에 시달렸다고 설명하지만, 검사는 도리어 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운수가 폭력을 승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병원과 법정은 학교와 더불어 근대적 교정 공간이다. 교정 공간은 정의와 사회의 기준을 자임하며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은 단죄한다. 대부분 현대의학의 근거값이 성인 남성이라는 점, 가정폭력 및 성폭력에 대한 처벌 수준이 시민의 인식 수준과 차이가 나는 것이 착각은 아닐 것이다.
연극 <로테/운수>는 로테와 운수의 일인극으로 진행된다. 1막 정신과 의사의 질문은 흰 벽 위 자막과 타이핑 소리로, 2막 법정의 질문은 사전 녹음된 음성으로 무대 위 등장한다. 그러한 외부 텍스트에도, 여전히 입으로 말하는 것은 두 여성뿐이다. 타이핑과 음성은 여성들을 단죄한다. 1막에서 정신과 의사는 결국 이 모든 것을 로테의 망상 증세로 파악했으며, 2막에서 판사는 운수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여 중형에 내린다.
한 시간 내내 무대를 활보한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비참함에 관객들은 탄식할 것이다. 마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행위가 기이할지라도, 전체 페이지에서 함께 호흡한 뒤 베르테르가 자살을 선택할 때 드는 허망함과 같이, <운수 좋은 날>에서 죽은 아내보다 죽은 아내를 부여잡고 우는 김 첨지가 더 안쓰러운 마음과 같이. 연극 <로테/운수>가 관객들에게 주고 싶었던 감정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과 달리 연극 속 로테와 운수는 죽지 않고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