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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 한 여자가 섰다. 마치 그녀를 공격하듯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몸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녀는 왜 카메라 앞에 서 있을까. 사람들은 왜 그녀를 찍으려고 안달일까. 유명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었다. 범죄자를 아들로 둔, 그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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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4월 16일부터 5월 17일까지 국립극단의 연극 ‘그의 어머니’ 재연이 공연되었다. 지난해 초연 당시 ‘2026년 관객 PICK’ 공연으로 선정되며 높은 만족도와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한 이 작품은, 하룻밤 사이 세 여성을 성폭행한 아들을 둔 어머니 브렌다의 처절한 심리적 붕괴와 사회적 시선을 다룬다.

 

작품을 접하고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제목이 왜 '그의 어머니'일까, 였다. 어딘가 모호한 제목이었다. 두 단어 모두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강세를 둔다면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일까, 아니면 ‘어머니’일까. 놀랍게도 이 극은 둘 중 어디에 강세를 두어도 자연스러웠다.


‘그’는 하룻밤 사이 여학생 세 명을 성폭행한 10대 소년 매튜를, ‘어머니’는 그런 매튜를 첫째 아들로 둔 브렌다를 지칭한다. 매튜는 재판을 앞두고 가택연금 중이며, 어머니 브렌다 외에 동생 ‘제이슨’도 함께 살고 있다. 집 안의 창문을 포함한 문이란 문은 모두 막혀있다.

 

조금이라도 그것이 열리는 순간 수많은 플래시들이 터지며 무대가 번쩍인다. 범죄자 매튜가 나오기만을 노리는 기자들이다. 극은 영상을 수시로 활용하여 주로 브렌다의 가족을 특필하는 언론의 모습을 비춘다. 특별히 마련된 공간 없이 무대 위에 영상이 포개어지며 브렌다 가족은 무방비 상태로 뉴스와 신문 속 인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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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가구와 조명으로 꾸며진 무대 위 집 안은, 제이슨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 것이다.

 

브렌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밥을 하고, 제이슨을 학교에 보내고, 매튜의 형량을 줄이는 데 열중한다. 그럼에도 하루아침에 성범죄자가 되어버린 아들 매튜와 그녀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눈치챌 수 있었다. ‘모성’을 지닌 어머니로서 그녀는 아들인 그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서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극 후반부의 여러 상황과 맞물리며 그녀의 감정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극 중에 ‘자식의 저주’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자식을 미워할 수 없는 브렌다의 딜레마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누구를 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원망, 변호사 로버트와 매튜의 여자친구가 내뱉는 말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족은 지키고 싶은 마음이 무대 위에 뒤섞인다. 브렌다는 어쩌면 충동적으로 기자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노출한다. 대중들 ‘그’ 보다는 ‘그’의 ‘어머니’에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극에는 성범죄라는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소년이 등장하지만, 작품은 범죄와 범죄자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덕적 판단 또한 잠시 유예한 채, 그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감정과 혼란을 다룬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감싸려는 브렌다를 향해 옳지 못한 행위라며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브렌다 역의 배우 진서연은 ‘그의 어머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나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엄마잖아요." 물론 이 말이 모성이라는 이름의 면죄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극은 이 모순을 끝내 해결하지 않고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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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을 다 보고 나와서도 브렌다가 결국 무엇을 선택하였는지, 매튜와 함께 재판장으로 향하는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무엇인지는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내게 남은 것은 휘몰아치는 딜레마 상황을 끝내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었다. 작품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상황 속에서 요동치는 한 인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일 뿐이었다.

   

결국 ‘어머니’에 강세를 두어야 하는 극인 걸까. 물론 이 작품은 ‘어머니’ 브렌다를 중심으로 두고 있지만, 그녀가 ‘그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 데에는 결국 ‘그’가 한 행위가 결정적이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브렌다’라는 한 개인이 아닌 ‘그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개인성은 사라지고 사회적 낙인만이 남은. 이 작품의 제목이 끝내 모호하게 느껴졌던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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