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정과 열정 그 사이를 전전한 지도 어느덧 4개월이 되어간다. 하지도 않아도 될 일까지 찾아가며 열정을 쏟았고, 관심을 기울여볼 법한 곳에는 기꺼이 고개를 돌리며 냉정으로 응수해 온 시간이다.
떠올려보건대 11월을 앞둔 시점까지 이러지 않았다. 온전히 열정뿐이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냉정이 지금보다 적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건 분명 마음의 여유가 부재해졌기 때문이고, 마음이 부재해진 이유는 시간적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눈 몇 번 깜빡이고 나면 해가 지는 생활이 4개월이 되가도록 적응이 안 되고 있다. 해가 지는 모습 정도는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어느 회사 건물 불뿐이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랬지만 내 친구는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그 정도로 여유 없이 살고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와는 큰 차이가 나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동기도 주변 반응이 바슷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부모님께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조금 더 나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 고 했더랬다.
마음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가 없다 보니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주변 일들에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며, 서로 한 번쯤 신경 써 줄 수 있는 일에도 관심을 끄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태가 심화된 얼마 전, 전에 즐겨 보던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를 다시 봤다. 고아라, 김명수, 성동일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법정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 대사 중에 그런 게 있었다.
"저는 모든 배석 판사님들이 저처럼 부장님을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훌륭하신 부장님들이 마음의 여유 한점 없이 사건 처리에 쫓기는 이런 구조가 너무 싫습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한 욕망이나 낙오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다는 보람으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사건을 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상황은 나와 많이 다르고, 판사직은 나보다 더 시간에게 쫓기며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이 마음에 다가온 것은 그 말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매일 일을 처리한다는 기분으로 일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도 눈을 둘 수 있는 여유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적응을 하기도 전에 이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시시각각으로 한다. 연말에도 했고, 연초에도 했으며, 어제도 했다. 전부 다 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이제 이곳에 내 일이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 먹었다면 또 할 수 있는대로 계속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이번에 추가로 마음 먹은 게 있다면 나름대로 여유를 찾아보겠다는 것, 그리고 일도 중요하지만 함꼐 일하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을 정도의 관심을 기울여보자는 것. 이를 위해서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전전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대로, 나의 위치에서, 나의 일을 멋지게 해내보이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