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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기술적 전환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크고 작은 ‘오류’ 속에서 일상을 보낸다. 기술적 결함, 사회적 균열, 불안정한 자아의 흔들림까지, 오류는 대개 수정의 대상이자 제거해야 할 문제로 간주된다. 서울대학교미술관의 전시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는 이러한 통념을 전복한다. 전시는 오류를 바로잡아야 할 실패가 아니라, 동시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필요 조건으로 제시한다. 더 나아가 전시는 관람자에게 ‘오류를 제거하려 애쓰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과 함께 걸어가는 산책자(플라뇌르, flâneur)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우리가 오류를 마주하는 자세는 어쩌면 자신을 다루는 방법부터 타인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확장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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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 참여한 12인의 젊은 작가 중 작가 한지형의 작업은 특히 인상깊었다. 그는 변형되고 왜곡된 인간 형상을 통해 미래 인류의 존재적 위기와 정체성 측면의 오류를 시각화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그려진 뒤틀린 인물들은 결함이라기보단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아의 흔적으로 읽힌다. 에어브러시 기법과 흐릿한 경계는 디지털 드로잉과 수작업의 구분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물질과 비물질, 현실과 가상 그리고 정체성의 경계를 교란한다. 이는 단순한 기법을 넘어 디지털 전환기의 감각 구조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결과로 보인다.

 

흔히 왜곡과 해체는 파괴적 상상으로 읽히기 쉽지만, 그의 작업은 오히려 그 균열 속에서도 지속되는 존재의 의지를 포착해 묘한 응원의 메시지를 건네는 듯 느껴졌다. 동물과 인간의 신체를 넘나드는 변형과 해체 속에서도 작품 전반에 스며 있는 존재 긍정의 태도는 그의 세계관을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에 머물지 않게 했다.

 

그의 작업은 온라인 기반 유스 컬처가 축적해온 시각적 감각과도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 큐레이션 플랫폼 ‘itsnotgallery’ 등에서 발견되는 동시대 작업들 역시 번짐과 왜곡, 경계의 모호함을 통해 청년 세대의 감각을 드러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제도적 의미는 다르지만, 감각의 층위에서는 일정한 공명이 느껴졌다. 이러한 작업들은 제3자의 분석적 시선이 아닌 ‘당사자의 위치’에서 시대의 불안정성을 표면화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매끄럽게 정제하기보다 의도적으로 거칠게 드러낸 표현은 완전무결함을 가장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까우며, 이 흐름 속에서 오류는 부정해야 할 실패가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로써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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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불안정성이 한지형 작가의 작품에선 개인의 차원에서 두드러졌다면, 김웅현의 영상 작품 〈프리키 케이지〉는 사회적 층위의 오류를 보여준다. 17–18세기 프릭쇼(freak show)를 차용한 형식은 오늘날 디지털 공간의 소비 구조와 유사하다. 작품 속 ‘괴짜’들은 과거의 기형적 신체에서, 현대 인터넷상에서 조롱과 흥밋거리로 유통되는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로 대체되었다.

 

타인의 일탈이 밈과 콘텐츠로 소비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처럼 인터넷이 일종의 공개 처형장처럼 기능하는 상황은,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존엄이 인간 스스로에 의해 침식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만든다. 나는 여기서 오류는 개인의 기행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며 안도하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작품은 관람자를 그 소비 구조의 바깥에 두지 않고, 우리가 이미 그 일부임을 자각하게 만들어 도덕적 역설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김천수의 〈로우-컷(Low-cut)〉 연작은 또 다른 층위의 오류를 제시했다. 작가는 고해상도 카메라 센서의 기술적 결함을 활용해 도시 재개발의 풍경을 포착했는데, 여기서 이미지의 손상은 단순한 촬영 오류가 아니라 재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흔적을 암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미 여러 문학 작품에서 다뤄져 온 재개발의 현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기술적 결함을 통해 사회적 균열을 가시화한 이 작업은, 우리가 익숙해진 구조적 폭력을 다시금 환기하도록 했다. 김천수 작가가 표현한 오류는 기술의 실패를 넘어, 사회가 감추어온 균열의 표면화와 기술의 발달에 등한시된 계층을 암시한다. 차가운 흑백 사진 뒤에 녹아있는 소외된 집단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이 연작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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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언급한 세 명의 작가 외에도, 전시에는 현시대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층위에서 ‘오류’를 조명하는 아홉 명의 작가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의 상이한 태도와 시각적 언어는 오류를 다루는 다양한 접근 방식을 드러내며 사유의 폭을 더욱 확장했다. 전시는 이러한 사례들을 양적으로 충분히 축적함으로써 관람자가 전시장을 나선 이후에도 오류에 대해 곱씹어보게 만드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정체성의 불안정성, 디지털 공간의 사회적 왜곡, 그리고 기술적 결함이 드러내는 구조적 모순까지. 전시는 다양한 층위의 오류를 드러내며 이를 수정해야 할 결함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류를 통해 시대의 균열을 읽어내는 방식을 제안했다. 완전함을 가장하려는 태도 대신, 흔들림을 인정한 채 동시대를 직면하는 시선이다.

 

오류를 제거하는 일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오류를 묻고, 외치고, 드러내는 일은 복잡하고 불편한 일이다. 전시는 그 불편함을 회피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는 완전한 존재일 수 없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조건 속에서 반문하고, 자신을 재구성하며 살아간다. 《오류를 거니는 산책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대의 급류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다시금 질문하고 재정의하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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