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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집었을 때 솔직히 조금 망설였다. 책의 제목에 ‘디자인’이 들어가 있고, 저자인 올리비아 리 역시 27년 차 UX서비스 디자이너라는 점에서 이 책이 과연 나에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디자이너도, 개발자도 아니기에 그래서 더더욱 이 책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선뜻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AI 이야기가 일상이 된 요즘, “일의 본질을 다시 설계한다”는 부제가 시선을 끌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나서 느낀 건, 이 책은 디자인 기술서라기보다는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전문성을 쌓아온 사람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리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는 점이다. 저자는 디자인을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구조를 세우고 흐름을 만드는 일'로 설명한다. 이 관점이 특정 직무에만 국한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해오던 일들이나 현재 내가 하고있는 업무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새로운 트렌드나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다룬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전체를 다 배우지 않아도 움직인다”는 저자의 태도였다. 새로운 툴이 나오면 무작정 공부부터 하는 게 아니라 기존 방식과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먼저 정리하고, 내 일에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바로 써보는 방식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괜히 모든 걸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시작조차 못 했던 순간들, 이론만 쌓아두고 정작 실전에는 적용하지 못했던 시행착오들이 떠올랐다. 필요한 만큼만 배우고, 실제 업무 안에서 바로 시험해보는 방식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학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한 이야기 다음으로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 여기서 저자는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이후 모든 해결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개선처럼 보였던 일이 사실은 구조상의 문제였고, 그래서 해결 방법 역시 부분 수정이 아니라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했다는 경험담을 통해 제시된 통찰은 특정 직무에만 한정되는 사례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회사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들 또한 '무엇을 고칠지'보다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어긋나 있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 장을 읽으며, 눈앞의 과제를 서둘러 처리하기보다 한걸음 물러나 구조부터 정리해보는 태도와 거시적인 시각이 왜 중요한지 한번 더 생각하게 됐다.

 

<일을 위한 디자인>에는 AI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이 책은 AI 툴을 잘 활용하는 기술적인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대신 AI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어디부터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지를 계속 강조한다. 특히 요약에 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AI가 만들어준 요약은 빠르고 그럴듯하지만, 무엇이 빠졌고 어떤 기준으로 정리됐는지는 결국 사람이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회의가 끝나고 AI로 회의록을 정리해보면 문장 자체는 유려하지만, 정작 중요한 맥락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결정까지의 과정은 간추려지고 결과만 깔끔하게 남는다. 보고서도 비슷하다. AI를 활용해 생성하면 겉보기엔 완성된 문서 같지만, 막상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정작 내가 전달하려던 포인트가 흐려질 때가 있다.

 

업무를 편하게 하려고 AI를 자주 쓰지만, 정작 결과물을 다듬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AI가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붙여넣는 게 아니라, 이게 지금 우리 팀이 실제로 합의한 내용인지, 내가 중요하게 전달하려던게 맞는지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빠진 조건은 없는지, 애매하게 정리된 부분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는 않을지 한 번 더 체크하고, 결국 문장을 내 상황에 맞게 다시 고쳐 쓴다. 그러다 보면 ‘정리’는 AI가 해줬는데, 맥락을 붙이고 책임질 언어로 만드는 일은 여전히 사람 몫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결국 남는 건 도구가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고 방향을 잡는 힘이라는 저자의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래 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들도 제시한다. 저자는 자신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로 네 가지 태도를 꼽는다. 학습 가능성, 호기심, 회복탄력성, 그리고 메타인지. 하나같이 거창한 기술이나 특별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그동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이 네 가지야말로 판도가 바뀔 때도 끝까지 남는 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새로운 것을 안다고 믿기보다 다시 배울 수 있는 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호기심, 실패를 흉터로 남기지 않고 근육으로 바꾸는 회복력,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는 메타인지까지. 한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저자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일을 위한 디자인>은 디자인 기술서처럼 보이지만,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이 ‘어떻게 계속 일해왔는지’에 대한 본질을 풀어낸 책에 가깝다. AI 시대에 필요한 건 더 많은 툴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구조를 세우고 맥락 속에서 답을 고르는 힘이라는 말은 디자이너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무엇을 더 단련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짚어주면서 기본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생각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책이었다. AI가 점점 더 많은 걸 대신하는 시대에, 내가 뭘 붙잡고 일해야 할지 고민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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